허균의 생애

허균은 양천 허씨로 1569년에 태어났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무렵에는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누이 난설헌과 함께 손곡 이달로부터 시를 배웠다. 1589년에 생원이 되었고, 159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병조좌랑을 거쳐 황해도 도사의 관직을 받았을 때, 서울의 기생들과 무뢰배들을 관아 별실에 드나들게 하는 등 방탕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에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불교를 믿는 등의 행각으로 계속해서 탄핵을 받고 파직되는 것을 반복하였는데, 세 번째인 삼척부사 자리에서 석 달만에 쫓겨날 때에는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대로 나의 삶을 이루겠노라.”라 하여 세상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가 어느 정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칠서지옥 이후에, 이이첨의 추천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617년에는 인목대비의 폐위에 앞장서면서 대북파의 일원으로서 왕의 신임을 얻고, 좌참찬으로 승징하는 등 점차 그 지위가 굳어졌으나 하인준 등과 역모를 계획하다가 탄로나 가산이 몰수되고 처형당했다.

허균은 그 재능이 뛰어났으나 행실이 방탕하고 자유분방하였으며 당대의 유교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더욱이 마지막에는 역모죄로 처형당했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고 엇갈리는 데가 있다.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라고 하여 인륜도덕을 저버리고 모든 악을 한 몸에 구비했다는 원색적이기까지 한 비난과 비판에서부터 그의 재능의 빼어남 및 남다른 시재(詩材)를 칭찬한 것까지 다양하다. 보통 허균에 대한 평가는 그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행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경우가 전반적이다.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기록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종종 윤리를 벗어나고 있는데, 처음 벼슬에서 쫓겨날 때의 행각 이외에도 누이 난설헌의 시집을 만들 때 중국시인의 것들을 은근슬쩍 끌어와 집어넣었다던가 광해군 시절에 벼슬을 할 때 명나라에 가면서 교묘하게 공금을 옭아내어 만 권이 넘는 책을 사는데 썼다던가 등의 행적이 그러하다.

허균, 홍길동,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