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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고에 대한 견해

사고 과정을 돌이켜 봄으로써 우리는 참여자 및 비평가의 이중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일련의 사고과정을 회고해 보면 우리는 여러 중요한 사실을 판별할 수 있다. 우선 사고의 과정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자신이 본 것(What you see), (2) 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What you think you see), (3) 그것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What you think it means). 비판적 사고에는 인과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이 인과적인 상관관계는 현상에서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패턴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고를 통해 쉽게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사이의 상관관계는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행위자가 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관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패턴의 특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 것과 자신이 생각하는 것 사이에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결정할 과학적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바꾸어 말해, 자신이 생각한 패턴이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실험의 체계적인 양식에 따라 그것이 직관인지, 인지된 것인지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조작적 실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일상에서 실제적인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법은 ‘본 것(관찰)’과 ‘생각한 것(패턴)’, ‘그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 것(중요성)’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 줄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판단한 것이 실제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것인지를 평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문제를 주관적인 접근으로부터 객관적인 접근으로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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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생애

B.C469-B.C399.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침. 그는 중류 가정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훈련을 쌓았으나 결국은 이 직업을 버리고 자기 자신과 가족의 부양 대책을 강구하는데 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결혼하여 2명의 자식을 두었다. 부인 크산티페는 예로부터 남편을 쥐고 흔든 사나운 여자로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의 (파이돈)편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이들 부부의 관계는 서로 의가 두터웠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생에 걸친 중요한 일은 도덕 문제에 대한 성찰이었다. 그는 자가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토론에 끌어들여서 공공연히 끈기 있게 이 성찰을 수행해 나갔다. 길모퉁이에서든 또는 광장이나 시장에서든 언제나 그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나 호기심을 갖는 방관자의 무리에 이하여 둘러쌓이곤 하였다. 그는 가차없는 질문과 풍자적인 비평 때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 반면에 또 그의 성격이 지니고 있는 매력과 고결한 특징 때문에 친구도 많았었다. 그는 아무런 저술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대화의 영향은 광범위하고도 깊었기 때문에 역사상 그는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공인되고 있다. 그에 대한 묘사는 그와 사적으로 친숙했던 플라톤,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에 의하여 전해 오고 있다. 이 세사람의 묘사는 일치하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것들을 비교하여 어느 것이 확실한가를 결정지을 만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러나 플라톤이 전해 준 묘사가 역사적으로 인정되어 온 묘사이며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속에 등장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야말로 부당하게 이상화되어 있든 정확하게 그려져 있든 간에 문화적 철학적 전통 속에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인 것이다. 그는 명랑하고 재치가 있었으며 만찬회나 연회를 즐겼었다. 그는 드디어 ꡐ신에 대하여 불 경건하며 청년을 타락시킨다ꡑ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하였다. 그는 아테네 의회에 의해서 유죄로 인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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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오블리제(nobless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사회 고위층 인사 혹은 지배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이 관습은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거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발적으로 앞장선 사례들로부터 유래된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의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마음가짐, 때로는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대처하는 덕목을 필요로 했다. 국가 간 전쟁이 발생했을 때만 생각해도 귀족들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례는 매우 많았는데, 그 중 한 예로 미국의 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과 George Herbert Walker Bush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임명되기 전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영국 이튼 스쿨의 학생들 또한 제 1,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사자의 명단은 학교 내 교회에 새겨져 있다. 다른 예로 한니발 장군이 이끈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벌인 16년간의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군의 우두머리인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 적은 수 같지만 그 당시의 총 집정관 수와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이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은 원로원의 귀족들이 모든 사회를 이끌어갔는데, 바로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때문에 로마가 발전할 수 있었고 따라서 당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쥔 초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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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道德經)

중국의 사상가이며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저서.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 하편 44장의 내용을 이라고 한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章句之學)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절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의 구성체제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며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이루는 기본사상은 변함없이 의 사상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유가사상은 인․의․예․지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남북조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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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삶과 철학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 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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