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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B.C. 569년경 사모스 섬에서 출생했다. 그는 젊었을 때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당시의 선진국에서 수학을 공부한 후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에는 귀족의 자제가 많았는데, 그들은 별 모양의 오각형 휘장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누구나 그들이 `피타고라스 학교`의 학생인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학교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연구한 것은 일체 밖에다 발설할 수 없도록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발견한 것은 모두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 발표해야 했다. 그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여러 가지 규율 아래 절제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규율 중에는 콩을 먹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이는 그들이 숫자를 표시할 때 모양으로 나타냈다. 피타고라스 학교 학생들은 졸업한 후에도 학교의 휘장을 달고 다닐 만큼 결속력이 강했으며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마침내는 하나의 비밀 결사 단체가 되었다. 세력이 커진 이들은 결국 정치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데, 귀족의 자제가 대다수였으므로 나라의 정치가 점점 귀족 중심이 되어 갔다. 그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반대파들은 위협을 느껴 피타고라스를 붙잡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져 그후 수백 년간이나 피타고라스학파로 남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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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업적

아르키메데스의 생애(B.C. 287-212)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인 아르키메 데스는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다. B.C. 287년 경 시칠리아 섬에 있는 옛 그리스 도시 시라쿠사(Syracuse)에서 천문학자 페이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시라쿠사의 왕 헤이론 2세의 친척이었다. 그 당시는, 학문에 뜻을 둔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집트로 건너가서, 알렉산드리아의 학교로 유학 가는 것을 큰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아르키메데스도 그들처럼 공부를 하기 위해 이집트로 건너갔다. 알렉산드리아의 대(大)연구소 무세이온의 학교는 유클리드의 활동무대였다. 때문에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영향 하에서 훈련을 받은 증거가 연구결과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그 곳에서 수학자 코논(Conon:BC 260년경 활약)에게 기하학을 배웠다. 또한 그는 꽤 오랫동안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뒤 고향 시라쿠사로 돌아와, 당시의 시라쿠사왕 헤이론을 보좌하며 많은 수학서를 썼다. 그는 로마가 시라쿠사를 정복하던 B.C. 212년에 사망했다. 그는 수학, 물리학, 기계학, 수력학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둔 천재적인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그의 이러한 면은 실생활에서도 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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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역사

수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 되었다. 교역, 분배, 과세 등 인류의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학이 담당해 왔으며, 농경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찰과 역(曆)의 제정, 토지의 측량 등은 직접적으로 수학이 관여해왔다. 수학이 학문 또는 과학으로서 주목된 것은 고대 그리스(희랍)시대, 대체로서력 기원 6세기경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찍 문명의 꽃을 피운 고대의 인도 ·중국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에서는 수학을 비롯하여 괄목할 만한 문화가 발달되었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나라로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중국 등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을, 바빌로니아에서 대수학(代數學)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탈레스나 피타고라스, 또 플라톤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 문화에 접하였다. 그리스는 이들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문명의 한 시기를 형성하였다. 예술에도 과학에도 많은 성과를 보이고 있으나 특히 수학에서는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스토이케이아)》, 아르키메데스의 많은 연구업적, 아폴로니오스의 《원뿔곡선론》디오 판토스의 《수론》등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학자들의 관심사는 철학과 수학이었다. 플라톤이 그의 강당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클리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기하학원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수학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체계화한 것으로서 유럽에서는 19세기 말경까지 교과서로 쓰이고 있었다. 이 책은 공리에서 출발하여 차례차례로 정리(定理)를 증명하여 체계화하는 오늘날의 수학의 형식에 가까운 것을 이미 BC 3세기경에 보여주었다. 내용은 피타고라스를 비롯하여 많은 선인들의 업적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제1권에서 제4권까지가 평면기하학, 제5권이 비례론, 제6권이 닮은꼴의 기하학, 제7권에서 제9권이 산술, 제10권이 무리수, 제11권에서 제13권이 입체기하학이고, 끝으로 정다면체 에 관한 문제가 설명되어 있다. 전체 13권중 8권이 기하학인데, 당시의 수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 체계에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여러 가지 결점도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수학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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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학의 역사

대수학의 첫 과정인 수의 기호표기는 이미 기원전에 인도·중국·아라비아·이집트·그리스 등 고대문명국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음수(陰數)를 사용하였고,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도 알려져 있었다. 바발로니아에서는 기원전에 이차방정식의 해법이 알려져 있었지만, 음수, 음의 근(根)까지는 고려되지 않았으며, 서양에서는 이런 상태가 16세기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에서는 BC 4∼3세기에 이차방정식을 작도(作圖)에 의해 풀었는데, 1세기 무렵에는 이것을 계산에 의해 풀 수 있게 되었으며, 3세기에는 부정(不定)방정식도 다루어지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6세기 무렵에 비로소 이차방정식의 해법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고대의 고전대수학은 그 후 완만하게 발전했으며, 13세기에 중국에서 고차(高次)방정식의 수치해법을 다루게 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도 이 분야에 관한 연구 등 대수학의 각 분야에서 급속한 진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진전 중에서도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페로(Scipione del Ferro)에 의한 삼차방정식의 해법의 발견과, 이것에 이어진 L. 페라리에 의한 사차방정식의 해법 발견이다. 또 둘째로는 F. 비에트에 의한 대수학의 체계화와 수식(數式) 표시상의 혁명을 꼽을 수 있다. 즉, 이전까지는 방정식은 문장으로 나타내었고, 비로소 독일에서 +, -의 기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인데, 비에트는 그 +, -를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미지수는 모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표시하고, 계수(係數)는 자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표시하는 등 미지수·계수를 문자로 나타내는 일반방정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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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의 시초

수와 형태에 대한 최초의 개념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동물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면서 살았는데 대부분 기본적인 먹이를 찾는데 힘을 쏟으며 살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조상(彫像)이나 그림 같은 예술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당시 그려진 동굴의 벽화들은 어느 정도의 의식적 중요성을 띠고 있다. 그 벽화들은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대상을 공간에서 2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려 숲과 사막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먹이를 찾아 떠돌던 유목 생활은 막을 내리고 토양이 기름진 곳에 머물면서 농사를 짓는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만한 정착 생활을 위해 영구적인 주거공간을 마련하였고, 기후와 포식 동물에 대항하기 위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부터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토기 및 좀 더 농사를 쉽게 짓기 위한 여러 도구들이 개발되었다. 이 모든 혁신적인 발명은 제한된 지역에서만 일어났으며, 교역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교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기술 및 여러 도구들의 전파는 상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순한 수 용어와 관계의 형식을 나타내는 단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업이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대상의 길이나 무게를 측정하는 것도 필요해졌다. 측정의 기준은 대략적이며, 신체의 일부분에서 착안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손가락, 발가락, 손을 단위로 이용하였다. 농사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시간이나 이와 관련된 태양, 달, 별의 운행에 대하여 계산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 사람들은 기하학적 패턴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켰는데 도기를 굽고 색깔을 칠하는 것, 바구니와 직물을 짜는 것, 금속으로 작업을 하는 것 등을 통해 평면과 공간의 관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장식은 합동, 대칭, 닮음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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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숫자는 수학의 발생기에 속하고 실용적이었으나 그리스는 합리적 사고에 토대를 둔 논리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이집트는 측량이나 작도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강력하고 안정된 왕조 아래서 일하는 측량 기사들은 위에서 명령받은 대로 결과를 내기만 하면 그만 이었기 때문에‘왜’ 그것이 맞는지 증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증명한 사람이 탈레스이다. 기원전 6세기 탈레스는 ‘논리’를 이용해서 도형을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논리적인 사고를 도형에 도입한 것은 그리스 사회의 민주제도와 관계가 있는데 민중의 토론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탈레스가 시작한 기하학은 피타고라스가 발전시키는데 피타고라스는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에게 기하학을 배웠다. 탈레스와 그의 제자들을 ‘이오니아 학파’라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세계최초로 음악이론을 만들었는데, 현의 길이의 비가 2 대 1이면 한 옥타브가 디고 3대 2면 5도 4대 3이면 4도가 된다는 등의 음의 간격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만물의 근원은 수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는 수에 집착했기 때문에 기하학뿐 아니라 ‘수론’도 연구해서 여러 가지 수에 이름을 붙였다. 기하학에서도 도형의 수량화에 힘썼다. 피타고라스는 탈레스가 사모스 섬에서 활약하던 시절, 그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한 곳도 사모스 섬의 신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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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기원

오래된 점토판조차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보여주고 있고 또 60진법 위치 체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분명하게 해 준다. 이 초기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점토판의 수학 원문을 보면 기원전 2100년경의 최후의 수메르인 시대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이 있고, 그 다음 시대로는 기원전 1600년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바빌로니아 왕조인 함무라비 왕 시대의 것이 대단히 많고, 그 다음에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300년까지 이어지는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시대의 것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와 세레우시단(Seleucidan) 시대의 것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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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율의 개념

황금비율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하학적으로 가장 조화가 잡힌 비율로서 미적감각이 뛰어 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분을 한점 P에 의하여 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그 한쪽의 제곱을 나머지와 전체와의 곱과 같아지게 하여 얻는 비율로서 하나의 선분 AB가 있을 때 그 선분상에서 한점 P를 구하여 (AP) =BP*AB가 되도록 하면 BP:AP=1:1.618이 된다. 이러한 황금비를 따르는 크기의 도형에 그림과 같이 2줄 대각선을 긋고 이 대각선과 4각을 잇는 수선을 그어 대각선과 교차하는 네점(A,B,C,D)을 이으면 황금분할된 장방형이 된다.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 파이( , 1.618)의 비율을 응용하여 만든 물건, 건축물 등은 다른 비율을 사용해 만든 것에 비해 가장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꽃의 꽃잎 속에서도 파이의 비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운 화음에서도 이 비율이 적용된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황금분할에 대한 선호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이를 이용한 상품들에 널리 사용되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예로 액자, 창문, 책, 십자가, 신용카드 등의 가로, 세로 비율 등에 황금분할의 비율이 적용된다. 특히 신용카드의 비율을 예로 들면 신용카드의 가로와 세로 비율은 각각 8.6cm와 5.35cm로 이 둘의 비율은 8.6/5.35=1.607로 황금비율에 의해 카드가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평면에는 1:1.618의 황금비가 적용됐다.  또한, 황금분할은 사진을 찍을때 응용할 수 있는데 위의 그림에서 AD,AB,DC,BC는 화면에서 수평선이나 수직선을 잡기에 가장 좋고 안정감을 준다. 따라서 이 속에 화면의 초점이 되는 대상을 위치 시키면 가장 알맞은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황금분할의 기초하에 사진 촬영을 할때에는 일일이 계산할 것 없이 화면의 분포를 대략 1/3로 잡으면 된다. 이와같이 1/3의 원칙을 의식해서 화면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틈에 무의식중에도 사용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황금분할의 법칙대로 화면이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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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가치

16C는 기독교가 와해되면서 그 동안 눌렸던 근대과학의 부흥이 일어났다. 또 새로운 세계의 사상이 나타나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사상이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일반원리에 관련시키려는 것이다. 즉, 세부적인 사실에 관심을 가지는 동시에 그 사실의 추상적인 일반화에도 관심을 가진 것이다. 과거의 초자연적 형이상학적 존재로부터 연역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 개개의 세부적인 것에 대해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일반화하여 귀납적인 설명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큰 변화 속에서 사상은 두 가지로 분리되었는데 로크에서 흄까지에 걸쳐 완성된 영국 경험론과 데카르트부터 라이프니츠까지에 걸쳐 완성된 대륙합리론이 그것들이다. 먼저 영국 경험론은 말 그대로 경험을 중시한 것이다. 사물에 있어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을 존중하는 실질적 정신인 것이다. 한편, 대륙의 합리론이란 합리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으로써 경험론처럼 사물에 대한 관찰과 실험도 중시하지만 그보다 거기서 얻어진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는 것을 더 중시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찾던 수학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대륙 합리론의 사상가들은 서로간의 관계를 찾는데 수학의 합리적인 힘을 빌려 왔던 것이다. 서론 부분에서 수학은 서양사상을 받쳐온 기둥 중의 하나 라고 언급했다. 수학은 대륙의 합리론이 이 존재하기 전에 필요한 전제인 동시에 결과이다. 수학의 합리적 논리가 존재치 않았다면 근대사상은 단지 경험만을 중시한 영국 경험론만이 발달해 어떠한 경쟁할 상대도 없어 중세 기독교 사상처럼 독단적인 안정만을 추구하고 변화되는 것은 쳐버려 근대 과학이 다시 도태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인즉 수학은 곧 근대서양사상의 두 기둥 중에 하나로 사상을 받치고 있는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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