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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核武器, nuclear weapon]

원자핵의 분열반응 · 융합반응에 의해서 일어나는 방대한 에너지를 살상 및 파괴효과에 이용하는 무기의 총칭. 원자무기라고도 한다. 현대물리학의 진보에 따라 1930년대에 핵분열의 원리가 발견되어 그 에너지의 이용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게 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주요 교전국에서는 핵에너지의 이용에 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미국에서도 A.아인슈타인 박사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맨해튼계획(Manhattan 計畵)이라는 암호명 아래 약 20억 달러를 투입해서 원자폭탄의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원자폭탄의 핵분열물질로서는 우라늄235^ 235U와 플루토늄239^ 239Pu가 사용된다. 우라늄235^ 235U는 천연산의 우라늄광석을 정제해서 얻어낸 금속우라늄 속에 0.7%밖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나머지 99.3%는 비분열물질인 우라늄238^ 238U이므로 우라늄238^ 238U로부터 우라늄235 235U를 대량으로 분리시키고, 또한 그것을 원자폭탄에 사용할 수 있게, 순도 90% 이상으로 농축하는 작업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이 같은 농축우라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공장시설과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게 된다. 플루토늄239 239Pu는 원자로 속에서 분열반응을 끝낸 폐기물로부터 정제 추출된다. 우라늄235 235U가 분열반응을 일으킬 때에 발생하는 중성자가 비분열물질인 우라늄238 238U에 작용하여 핵분열물질인 플루토늄239 239Pu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1942년 테네시주(州) 오크리지에 우라늄 분리공장을 건설하고 1943년부터 우라늄235 235U의 분리 ·농축작업에 착수, 원자폭탄 제조에 필요한 만큼의 양을 얻게 되었고, 1942년 12월에 오크리지에 건설한 1,000kW의 대규모 원자로로부터 플루토늄239 239Pu를 얻어내는 데 성공, 1943년부터 조업을 시작하여 1944년부터는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자폭탄의 제조를 위해서 1943년 7월 뉴멕시코주(州)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에 연구소가 설치되었고,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 8월 6일 우라늄235 235U를 사용한 원자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8월 9일 플루토늄239 239Pu를 사용한 원자폭탄을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하여 두 도시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정량[臨界量]의 핵분열물질(5~20kg)이 필요하므로, 예전에는 폭발력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근래에는 폭발효율을 낮춤으로써 소형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고, 초임계량을 사용해서 효율을 높임으로써 대형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대소형의 원자폭탄의 출현으로 온갖 무기체계에 원자폭탄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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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의 발명

기원전 3000년 경 이라크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불에 잘 녹는 구리가 발견되자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된 청동이 나타났다. 청동은 질기고 강하여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드는데 적당하였다.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사용된 우리 나라의 청동기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여 만들었다. 구리가 녹을 때(400℃) 아연은 증기가 되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거푸집(주물틀)에 넣어 원하는 형태로 청동기로 만들었다. 청동검 인류가 최초로 사용하게 된 금속은 청동이었다. 그 이유는 먼저 청동의 주원료인 구리가 지표면에서 가장 가까이 매장되어 있다는 점과 제련하는데 필요한 온도가 다른 금속에 비해 낮아서 신석기 시대에 질그릇을 굽던 온도로도 충분히 제련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청동기에는 흔히 여기에 납이 더 포함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도 구리, 주석, 납으로 된 것이 많은데, 특히 아연이 더 포함된 것들이 있다. 아연을 합금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고 송나라 때까지도 드물게 나타나는 매우 높은 기술을 요하는 것인데 이미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러한 높은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청동기는 형태상 중국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아연이 합금되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졌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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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의미와 역사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에 “칼의 양편에 날이 있는 것을 劍이라 하고, 한편에만 날이 있는 것을 刀라고 한다. 후세에 와서는 검과 도가 혼용 사용되었다.”고 하며, 검과 도를 통칭하여 우리 나라는 칼이라고 발음을 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무기중에서 칼과 창과 활만큼 오랜 세월 사용된 무기는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총으로 대체된 것이 오래된 일이 아니다. 돌로 만들어 사용하던 칼과 창 등이 쇠로 바뀐 것은 배달나라 치우천황 때이다. 치우천황은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내어 아홉 개의 야금소(冶金所)를 움직여 칼과 창등을 만들었으며 이 청동제 무기는 누구도 대항 할 수 없는 첨단병기였다. [한국상고무예사. 151쪽] 검(劍)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관자(管子). 지수편]에는, “동이족으로 치우가 검을 만들었으며, 치우는 동이족으로 중원까지 군신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사실상 중국에는 검술이 전해지지 않았고 동시에 그 무기 또한 드물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청동기와 철기 문명이 가히 선구적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정신 문화영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때에 출현한 동검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으로 주로 요령지방에서 출토되며, 고조선 후기엔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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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사회와 문화

대체로 BC 10 ~ BC 4세기 경으로 청동기의 사용, 정착농경의 본격화, 계층과 전문장인의 발생, 지배자 무덤의 축조, 대규모 마을의 출현, 민무늬토기와 간석기의 사용 등과 같은 사회 문화적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남한 지역은 철기가 도입된 BC 3~2세기 경에 오히려 청동기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는 크게 전기의 요령식 동검문화와 후기의 한국식 동검문화로 구분된다. 실제 청동기는 일부 지배자들의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고 생활용품들은 여전히 간석기나 목기들이 사용되었다.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사가 발달하면서 평등했던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였다.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시대는 사회와 경제가 급격히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 및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군장들이 사용하였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세계와 인간의 불합리성으로 인한 갈등의 내용들이 미술에 나타나게 된다. 청동기시대의 미술도 미적(美的) 충동에 의한 것보다는 깊은 심성적 신앙세계와 연관되어 보이는데, 이 시대 인간의 내적 세계가 얽히고 잠재되었거나 표출되었던 심정적인 내용들이 있고 아직 밝혀지지 못한 청동기 시대인의 내적 복잡한 정신세계의 여러 현상들이 들어 있다. 즉 원시적 도덕관념과 신앙형태의 종합적 현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 시대 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문화현상 들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시기이다. 놀라운 예술성과 다산성의 청동기시대 문화 현상 들은 다음 시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찬란한 문화예술의 시대를 예감하게 해주는 여명의 시대이다. 실제로 다음 철기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월등하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많은 예술 작폼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새로운 문화현상이 속출했던 시대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면에서나 많은 예술 활동이 이 무렵에 있었다. 각종의 청동기 미술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는 청동검과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독특한 것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부장품으로서 지금까지 많이 출토되고 있는 청동검은 지금도 무당들이 무구메具)로 사용하고 있으며, 청동거울, 방울 역시 무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기의 미술에는 장식에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 많다. 그 모양이나 장식에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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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역사

공격(公格)력을 기동(機動)화시킨 무기(武器)에 대한 착상은 고대(古代)로부터 존재(存在)하였고, 여러 모양의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채리엇(chariot)도 그 한 예이다. 이것은 말이 끌도록 된 일종의 2륜차로서, 그 위에 전사(戰士)가 탑승하여 말을 몰면서 칼·창으로 상대를 공격(公格)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대적(現代的)인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世界大戰) 초에 기관총의 격파·방어선의 돌파(突破)를 위한 새로운 무기(武器)로 개발(開發)이 된 것이다. 당시 연합군(聯合軍)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해 오는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成功)하였으나, 기관총·대포 등의 강력한 화력과 철조망·참호 등으로 조직적(組織的)으로 구축된 독일의 방어선(防禦線)을 돌파할 수가 없어, 전선이 고착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14년 영국 육군의 E.슬라인튼 중령은 이러한 전환(轉換)을 타개(打開)하고 적의 방어선(防禦線)을 뚫기 위해 트랙터에 화포(火砲)를 장치(裝置)한 전차(戰車)를 고안(考案)하게 되었다. 이 전차(戰車)에 대한 건조안은 육군(陸軍)성에서 부결되었으나, 당시 해군(海軍)장관이었던 W.처칠이 해군의 예산으로 전차의 연구·개발(開發)을 후원(喉院)하게 되어 세계(世界) 최초(最初)의 전차인 마크Ⅰ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M1 전차(戰車)라고도 하였고, 무게 28t, 최고속도 6km/h, 항속거리 약 20km, 57mm 포 2문과 기관총 4문을 탑재(搭載)하였다. 그 후 계속 개량(改良)되어 M Ⅷ형까지 만들어졌으며, 성능도 시속 8km, 항속(恒速)거리 40km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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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육군전력

육군은 국가 보위의 주력으로서 평시에는 해·공군과 함께 전쟁을 억제하고 전시에는 모든 지상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다. 육군은 육군본부와 3개 군사령부, 항공작전사령부, 특수전사령부와 이를 지원하는 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11개 군단, 50여 개 사단, 18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군은 주요 전력으로 56만 여명의 병력, 전차 2,250여대, 야포 4,850여문, 장갑차 2,300여대 등을 보유하고 있다. 2개 야전군은 북한과 접촉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수도권을 포함하는 지역까지 책임지역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각 야전군은 수 개의 군단사령부 및 사·여단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들은 북한군의 기습 및 고속기동전에 대비하여 북한지역으로부터 수도 서울에 이르는 주요 축선에 한국형 전차와 각종 화포, 대전차 유도탄 및 지대공 미사일 등을 배치하고 있다. 1개 야전군은 전방 야전군의 후방지역부터 시작하여 해안선을 포함한 후방지역 전체에 대한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수 개의 군단 사령부 및 사·여단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들은 지상·해상·공중을 통한 북한군의 침투를 거부하고 적이 침투 시에는 이를 격멸할 수 있도록 전·평시 공히 해안경계와 국가 주요 시설 및 병참선의 방호임무를 수행하며 전시에 대비하여 동원물자 및 예비전력을 관리하는 임무를 병행한다.항공작전사령부는 항공여단 및 수 개의 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로켓트, 토우, 발칸, 기관총 등으로 무장된 다양한 헬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기동부대에 대한 화력지원과 공중수송 및 정찰임무를 지원하고 필요시 적의 후방지역까지 이동하여 적시적인 화력지원과 공중공격 임무를 수행한다. 특수전사령부는 수 개의 특전여단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첩보수집과 아군의 화력유도 및 별도 부여된 특수 임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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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효용가치

거북선이 일본함선보다 '철갑처럼'튼튼했던 것은 일본의 함선은 비교적 조직이 약한 삼(杉)나무를 쓴데 비하여, 조선의 군선은 소나무나 혹은 밤나무와 같이 조직이 강한 나무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못질과 같은 판자사이의 결합에 있어서 조선은 참나무 못을 판자를 관통시키며 연결하는 구조로 박았지만, 일본은 쇠못으로 그냥 이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함선은 일본함선에 비하여 내구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함선은 이음새가 부실하고, 무엇보다도 가늘어 화포를 탑재하면 그 반동력으로 배가 뒤집어질 위험이 있었으나, 조선의 함선은 반대이고, 또한 평저선이 넓어 화포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강점에다가..속된 말로 하자면 거북선에 '뚜껑'을 쇠로 씌우던 나무로 씌우던, 일본군에게는 말 그대로 '쥐약'이었다. 일본의 전통 해전전술이란 적선에 병사들이 뛰어들어 적선을 통째로 장악해버리는 것이었는데, '뚜껑'의 존재는 배 위로 뛰어내리지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뚜껑'을 나무로 만든다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거기다가 사방으로 화포를 쏘아데는 거북선의 모습은 일본군에게는 충분히 공포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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