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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빨강)

Red (빨강) 빨강은? -열정의 색, 사랑에서 증오까지의 색, 왕과 공산주의의색, 환희와 위험의색등등... 빨강은 몇가지나 있을까? -모두 105가지의 색이있다. 1. 빨강의 대중성 빨강은 사람이 이름 붙이 첫 번째 색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색 이름이다.스페인어로 콜로라도colorado라고 한다.빨강의 상징은 두가지 근복적인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 빨강은 ‘불’이고 ‘피’이다. 바ㅏ빌론과 에스키모의 언어처럼 빨강은 ‘피와 같은’의 의미로 쓰이는 곳이 많다. 불과 피는 시대와 문화의 차이를 막론하고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빨강의 상징은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며 누구에게나 알려져있다. 2. 열정.사랑.증오 사랑/ 빨강 75% ,분홍 7% 증오/ 빨강 38%, 검정35%, 노랑15% 사랑에서 증오까지, 빨강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열정을 나타내는 색이다.피가 끓으면 머리로 올라가고, 부끄럽거나 또는 사랑에 빠지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창피할 때, 화가날 때, 흥분했을 때 우리는 얼굴이 발갛게된다. 빨강장미도 사랑을 의미하고, 심장은 빨강으로 그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피가 심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아 그렇게 표현하는 것같다.증오를 나타내는 색도 빨강이 속해있지만, 사랑의 빨강이 검정과 합쳐지면 더욱 증오를 뜻하는 색이 깊어진다. 3. 피와 생명의 색 힘,강함/ 빨강 28% , 검정 20%, 파랑 17% 용기/ 빨강 28%, 파랑 23%, 금색 12%, 은색8%, 녹색8% 매력적/ 빨강 23%, 파랑 14%, 금색 12%, 검정 9% 빨강은 긍정적인 생명감을 나타내기도한다.(피가갖는 심리적,상징적 영향때문에...)빨강은 힘의 색, 생명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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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yellow)

노랑의 사전적 의미 -노랑[명사] 1 노란 빛깔이나 물감. 2 기본색의 하나. 빨강, 파랑과 더불어 컬러 사진이나 그림물감 따위의 감산 혼합으로 색을 표현할 때에 삼원색을 이룬다. 먼셀 표색계에서는 5Y 8.5/14에 해당한다. 흰색 다음으로 밝은 기본색이다. 전자기파의 스펙트럼에서는 5,760~5,800Å(옹스트롬)의 파장에 해당하며 표준 노랑은 먼셀 표색계(表色系)에서 2.5 Y 8/12 정도에 해당한다. 시안(청록)·마젠타(붉은 보라)와 더불어 컬러 사진이나 그림물감의 3원색이 되며 보색(補色)은 파랑이다. 노랑은 빨강이나 주황과 같이 난색(暖色)이며 진출색(進出色)이므로 크게 보인다. 안전색채(安全色彩)에서는 노랑에 ‘조심’의 뜻을 지니게 하여 주의 또는 방사능 표지에 사용한다. 노랑과 검정의 굵은 사선의 얼룩무늬는 가장 강하게 주의를 끈다. 노랑은 청록·붉은 보라와 더불어 3원색이 되어왔으며, 이 3색은 일상생활에도 널리 쓰인다. 그러나 노랑은 다른 두 색만큼 다양한 색상을 갖지 못하여 한국에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노랑계통의 빛깔을 구별해왔다. 즉 조금 빨강이 가미된 것을 귤색, 조금 더 빨강을 띠면 주황, 희끄무레한 노랑은 미색, 파랑을 띠면 노랑연두 등의 명칭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용된다. 중국의 5방(五方)·5색(五色)·5행(五行)의 사상에서는 황색은 중앙과 대지를 나타내고, 지하의 샘이란 뜻으로 황천이란 낱말이 생겼다. 또 노랑은 경박(輕薄)·불신의 감정을-------------------------------------------------- 16. 시기와 질투, 거짓의 색 시기 노랑 38%, 녹색 22%, 회색 10%, 검정 8% 질투 노랑 35%, 녹색 17%, 검정 15% 구두쇠 노랑 26%, 회색 21%, 검정 13%, 갈색 12%, 녹색 10% 이기심 검정 20%, 노랑 16%, 빨강 14%M 보라 12%, 금색 9% 노랑은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나쁜 노랑은 태양의 노랑이 아니며 황금빛 노랑도 아니다. 그것은 녹색 기운이 도는 창백한 노랑, 고약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노랑이다. 노랑은 모든 화의 색이다. 시기는 노랑이다. 시기란 남이 가지고 있는 물건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질투도 노랑이다. 질투는 다른 사람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구두쇠, 노랭이도 노랑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시기심을 품은 자와 구두쇠 짓을 하는 자는 사형죄에 해당한다. 기독교에서 사형죄로 취급하는 일곱가지 죄는 모두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사형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게 된다. 죄를 지은 자가 가장 커다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는 영원한 화의 원천이다. 구두쇠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믿기 때문에 늘 화를 낸다. 돈만 좇는 사람은 피부가 노랗게 변하는 ‘황달’에 걸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옛날 사람들은 화가 담즙에 들어 있다고 믿었다. 독일어에서 ‘담즙Galle’은 ‘노랑Gelb’과 동일한 어원에서 나왔다. 담즙은 노란 녹색을 띠기 때문에 “시기심 때문에 얼굴이 녹색으로 변했다.”는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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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청동주물 제작과정도 하나의 예술. 서울에 온 `지옥의 문`은 매 일 50여명의 장인이 참여, 2년 7개월간의 작업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프랑스와 오귀스트 르네 로댕은 184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917년 죽기까지 전 생애를 조각에만 쏟아 넣은 의지(意志)와 정열(情熱)의 예술가였습니다. 1864년,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이후 , , , , , 등과 위대한 걸작인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으며, 토르소 작품은 , , 등의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리한 사실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생명의 약동과 아울러 육체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영혼(靈魂)의 움직임까지 극명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단순한 리얼리티(Reality)의 차원을 초월, 근대 조각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인상주의(印象主義)의 새 경지를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댕은 젊어서 여러 미술전에 출품했지만 그 때마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각을 빚는 그의 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달했고, 결국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조각가로서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조각 작품들은 대체로 딱딱한 청동을 재료로 만들었는데, 로댕은 이러한 재료를 갖고도 진짜 살아있는 것과 같은 청동상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조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하여, 사람들은 로댕이 손으로 직접 빚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하기 까지 이르렀습니다. 조각 (1898)은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해 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로댕이 자기가 죽으면 무덤 앞에 세워달라고 했을 정도로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로댕이 본래 누구를 보고 이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것이냐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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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의 처형

등을 돌린 채 총을 겨냥하고 있는 군인들은 모두 얼굴을 알 수 없게 처리된 데 반해 단 한 사람, 모자 뚜껑이 붉은 하사관만이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개인적 특성을 살려 그렸다. 짙은 눈썹과 콧수염, 그리고 가운데만 돋은 이상한 모양의 턱수염이 인상적이다. 그는 발사 명령만 내린 채 돌아서서 자기 총을 손질하고 있다. 총소리가 시끄러울 텐데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그는 막시밀리안만큼이나 침착해 보인다. 이상스런 고요함이다. 이건 담장 위에서 총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모습에서 또 한 번 반복된다. 사람이 죽는데 마치 서커스 구경을 나온 것 같다. 가운데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사람은 아예 감상을 하고 있는 폼이다.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사람도 턱을 괴고 편안히 쳐다본다. 이건 뭔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이 밖에도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화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들이 많다. 군인들과 처형당하는 사람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다는 점, 주인공인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아주 세심히 뭉개져 있다는 점,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애매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 그리고 담장에서 넘겨다보고 있는 구경꾼들의 태도가 사건의 정치적 중요성이나 비극적인 성격과는 반대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 무관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점 등이다.이 모든 이상한 점을 종합해 보면, 이 그림은 기존의 역사화가 갖고 있었던 ‘기록’으로서의 특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작가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그린 역사화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건을 담은 사진을 토대로 재구성한 그림을 보면, 막시밀리안은 맨 오른쪽에 서 있었고 모자를 쓰고 있지도 않았으며, 군대와 처형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상식적인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구경꾼들은 담장 위가 아니라 군대의 뒤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진보다 나을 수 없고 또 사진이 있는데 굳이 그림에서 이를 반복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림이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전달해 주는 사진’이라는 매체와 다른 점은 작가 개인이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마네의 그림은 그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바로 멕시코 하사관의 모습과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이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그림에 대해 졸라가 쓴 글을 보면 마네의 의도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이 그림은 사건의 책임이 프랑스 정부에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막시밀리안을 죽인 건 멕시코인이 아니라 바로 너, 나폴레옹 3세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Ⅲ. 전통을 거부하다 마네의 그림에서 주목할 수 있는 특징은 그의 그림에서 주제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에서 제목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 구조, 즉 전통적 주제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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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Eifel)

1889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엔지니어 구스타브 에펠의 건축되 었다. 높이 317미터 7500톤의 무게 1652계단을 가지고 있는 이 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20세기 파리의 상징 물이다. 당시 에펠탑을 매우 싫어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 이 에펠탑뿐이어서 에펠탑 위에 있는 식당에서의 식사 초대에만 응했다고 한다. 재치 있는 농담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에펠 탑의 찬, 반론은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매년 1억 5천만 이상의 관광객이 에펠탑에 오르고 있으며 전 세계가 파리와 에펠탑의 이미지를 혼동할 정도가 되었다. 파리 시내의 어느 곳에서나 에펠탑이 보이는데 어느 곳에 있던지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문득문득 에펠탑이 보일 때 마다 자신이 지금 파리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에펠탑의 모습은 정말 멋질 것이다. 가장 좋은 상태에서는 70Km 까지도 볼 수 있으며, 일몰 시간 1시간 전이 가장 전망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철의 경우에는 9시가 넘어도 일몰을 보기 힘들므로 저녁을 먹고 나서 천천히 올라가서 에펠탑에서 밝았을 때의 파리의 모습과 일몰 때의 모습, 그리고 파리 시내의 야경까지도 구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에펠탑에서 바라보는 해가 지는 파리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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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 [ 立體派, cubism ]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 특질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 ·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입체파의 탄생】 “자연을 원통형 ·구체(球體) ·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 “색채 속의 면(面),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 《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는 그 전년에 사망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젊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 회장에서 세잔이 특히 1880년대에 그린 구축적(構築的)인 화면에 매혹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1908년을 입체파 탄생의 해로 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다같이 기하학적인 포름, 예를 들면 구체(球體) ·삼각추(三角錐) ·원통형 ·입방체(立方體) 등을 응용하여 대상을 마무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초기 입체파를 ‘세잔풍의 입체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래 입체파(큐비즘)라는 명칭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의 혁신적인 운동이 일반대중에게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경멸적으로 사용된 비난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입체(立體:Cube)란 최초로 비평가인 R.보셀이 브라크의 작품에 붙인 이름이다. 보셀은 1909년에도 브라크의 작품에 대하여 몇 차례 ‘기묘한 입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세잔의 계열을 따른 새로운 화면구성을 의도하면서도 반드시 ‘기교(奇矯)함’을 중시하지 않았던 사실은 다음의 두 사람의 문장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달리 큐비즘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의 마음에 끌린 것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피카소), “내게 있어 큐비즘이란 내 습관에 적합한 입체적인 표현수단이며 이것을 이용하면 나는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의 큐비즘이라고 말해두기로 한다”(브라크).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明暗)을 없앤 수법으로, 흑인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는데, 브라크와의 교우가 시작된 것도 같은 해이고, 피카소는 홀타 데 에브로의 에스파냐 풍경을, 브라크는 세잔과 같이 에스타크의 풍경을 발표하여 새로운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보면, 피카소에게는 예술가의 직관(直觀)이, 브라크에게는 명석한 논리가 현저하여 각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 【분석적 입체파】 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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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처녀들

미술가들은 모든 현대예술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이 그림에서 최초로 한 화가가 사실적인 모습과 단절하고 새로운 회화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위쪽의 세 여인은 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커다란 눈을 가지고 가운데 위치한 여인은 귀가 8자 처럼 그려져 있고 얼굴은 정면인데 코는 옆으로 위여 있다. 오른졲의 각진 형태를 한 두 여인은 줄무늬 섞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그녀들의 얼굴은 대칭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위쪽 여인의 커다랗고 검은 눈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다른 눈은 3/4 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 또한 아랫쪽 여인은 등을 돌리고서 앉은 자세에서도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최초의 큐비즘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진 피카소의 누드화입니다.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홍등가인데, 피카소는 아비뇽의 창녀들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두 인물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만, 오른쪽 두 인물과 맨 왼쪽의 인물은 얼굴과 몸이 심하게 변형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최초의 큐비즘 작품이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아직 과도기적 상태이긴 하지만 큐비즘의 모든 특징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그림에서 주목해 볼 점은 원시주의적 요소를 차용하여 인물의 형태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쪽 상단의 여인을 봅시다. 여인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처음에 피카소는 중앙의 두 인물처럼 다른 인물들도 그렸다가 그림이 너무 밋밋하다고 느꼈는지 나중에 나머지 세 인물들에 수정을 가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미술품을 상당수 수집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가면조각에서 힌트를 얻은 얼굴을 오른 쪽의 두 인물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아래에 앉아 있는 여인을 봅시다. 그녀의 왜곡은 다른 인물보다 더 심합니다. 가면같은 형상을 한 그녀의 얼굴은 분명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그녀의 몸통은 지금 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획기적인 점은 전통적인 원근법이 사라지고, 여러 각도에서 본 시각이 하나의 평면에 종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선 입체감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피카소는 여체의 특성을 각진 면들로 환원시켜 드러내고 있는데, 그는 명암에 의해 암시하는 방법으로 독특하게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상단의 인물을 봅시다. 그녀의 가슴은 마름모꼴입니다. 여기에 음영을 주어 가슴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죠. 이런 방법이 모든 인물에게 쓰인 것은 아닙니다. 이 여인에 비하면 중앙의 두 인물은 거의 고전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여인의 가슴의 입체감을 표현한 방법은 인물들 뒤에 있는 흔들리는 커튼에서도 보입니다. 피카소는 이렇게 대상의 특성을 기하학적 형태로 파악하고, 입체감을 암시하는 명암을 사용하여 대상을 그리는 방법을 발전시켜 큐비즘이라는 양식을 낳게 됩니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며 크기는 243.9x233.7㎝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상세 이름은 《바르셀로나의 아비니호가의 여인들》이다. 화면에는 5명의 벌거벗은 여인들이 기하학적 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조각을 나눈 뒤 한 화면에 종합하여 배열한 듯하다. 공간적 배경은 푸른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윤곽만을 표현하여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가운데 두 여인은 최초의 구상 단계를 유지한 편이나, 양쪽의 여인 셋은 신체의 조각들을 섞어 조합한 듯한 모습이다. 왼쪽 눈은 정면을 보지만 오른쪽 눈은 4분의 3 각도로 옆을 쳐다본다. 또 등을 보이고 앉은, 아프리카 가면을 쓴 듯한 여인은 정면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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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세기말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리처드 스트라우스의 오페라가 인기였고 연극이나 왈츠의 전성기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가톨릭 보수당의 쇠퇴로 인해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나태한 시기였다. 이러한 쇠잔한 상황에서 세련된 색채와 장식적인 형태로 아름다운 작품을 보여준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의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귀금속 세공사 집안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 세공사였다. 구스타프는 7형제 중 장남이었으며, 일가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즈음 빈에 몰아닥친 경제 공황으로 클림트 역시 재정적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하였고 그의 나이 14세 때 오스트리아 미술관 부설 공예학교에 입학하여 페르디난도 라우프베르거에게 데생기법과 회화를 사사받았다. 클림트는 청년기에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극장이나 미술관의 장식에 참여했다. 클림트는 스승의 화려한 장식양식을 계승하기도 하고 한스 마카르트의 상징적 역사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880년부터 그는 스승의 소개로 동료 프란츠 마츠와 함께 빈 극장의 천정화 등을 장식하게 되어 젊은 시절부터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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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S. 프로이드(1856-1939)나 A. 애들러(1870-1937) 등 다른 어느 심층 심리학자들보다 종교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보통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종교라는 단어에서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 어떤 특정한 종파를 의미하거나, 그 교단들에서 믿고 있는 신조(credo)를 가리켰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신(神)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체험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된 상태, 또는 변화된 의식에서 나오는 어떤 특별한 정신적인 태도를 의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온통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존재를 만나고, 그 존재를 만난 다음에 삶이 변화되고,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융은 오늘날 기독교는 현대인들의 삶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혼에 깊숙히 스며들지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현대의 종교적인 상황, 특히 기독교의 영적인 상황을 이렇게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기독교가 현대인들의 영적인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대인들의 영적인 고통을 달래주지도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종교의 가치가 극심한 도전을 받고 있던 지난 세기말, 어떤 것이 융으로 하여금 종교와 종교현상들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했는가? 그의 삶에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체험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심리학 사상, 특히 종교적인 현상과 관련된 분석심리학 사상을 살펴보려면 먼저 그의 삶을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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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안의 개

이 그림은 화풍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기억의 고집》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가 1929년 제작한 그림이다. 같은 해, 초현실주의의 대표주자인 그는 다른 예술에도 관여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의 한가지 특징 중 하나인 상호텍스트적 예술이 자리잡히기 시작하는 데, 이 때의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e 이란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 사이의 통합과 만남을 의미한다. 비로소 장르와 장르의 혼융이 이루어지고,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초현실주의자였던 달리는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Salvador Dali, 그는 자신의 생각을 영화로 표현하고자했다. 1929년 그가 동료인 루이 브뉘엘 Luis Bunuel과 함께 작업했던 영화가 바로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여기서 시나리오와 촬영에 동참하게 된다. 그의 동료 루이 브뉘엘은 초현실주의 영화의 선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영화사에서, 20세기 예술사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추구했던 초현실주의란 무엇인가? 초현실주의는 불어로 surrealisme로 옮겨진다. 불어에서 sur는 '∼의 위에', '∼을 초월하여', 이외에 '∼에 대한'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즉 sur-realisme이란 '현실에 대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주의' 라는 이중의 메시지를 가진다. 환멸적인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러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몸짓, 몸부림. 다다이즘이나 아방가르드의 움직임이 초기의 목적의 달성을 이루지 못하고 무방향적, 무목적적, 무정부적 게릴라전이었던 데에 비해, 초현실주의 운동은 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또한 다다이즘나 아방가르드보다 자의식적이었다. 당시의 초현실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맑스의, 정신분석학적으로 프로이드의, 철학적으로 베르그송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예술적으로 다다와 아방가르드의 동시대, 또는 약간 후세대이기에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제 영화《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안으로 들어가 보자. 안달루시아의 개?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제목은 이오네스코의 여러 극의 제목을 생각나게 하리만치 부조리하다. 개의 모습은 작품 어느 구석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영화의 제목을 안달루시아의 개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작 노트를 훔쳐보자. "이 영화의 제목은 멋대로 정하거나 농담 삼아 자은 것이 아니다. 이 제목은 주제와 밀접한 잠재 의식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수 백가지 제목들 중에서 이 제목으로 정한 것은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호기심 삼아 덧붙이건데, 어떤 관객들은 이 제목 때문에 사실 강박관념이 생겼다고 한다. 제목을 멋대로 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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