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각시놀음의 개념
한국에서는 예부터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꼭두(꼭둑) 혹은 꼭두각시가 널리 사용되어 왔다. 한자어로는 괴뢰, 귀뢰, 면괴, 목우, 목용, 토우, 토용, 우상이라고 하여 탈을 가리키는 의미와 혼용해왔다. 이런 용어가 사용된 것은 실제 인간과 유사하지만, 가장된 인격체이고 귀신과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형극(꼭두각시놀음)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극으로 인형이라는 간접적인 표현방법을 통해 그 시대의 억눌려 표현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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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놀음의 유래
인형의 원초적 형태를 찾는 데는 먼저 신성물의 정적인형(靜的人形)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자기확대(自己擴大)의 소박한 창의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에 의한 조작적 우인물(偶人物)이 신앙적 대상으로 숭앙되었음은 원시신앙의 단계를 가늠하는 하나의 보기가 되는 것이다. 신앙적·상징적 대상으로서의 우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발달과정에서 정물(靜物)에서 동물(動物)로의 발달을 보게 되었을 것은 짐작이 가는 것으로, 그러한 예가 고대인형의 간단한 수족의 동작부위(動作部位)들로 실증되는 것이라 하겠다.
민속인형극의 전래
전래하는 우리나라의 민속인형극을 들자면 지금으로는 꼭두각시놀음밖에 없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만석중놀이(忘釋僧戱)나 장난감인형놀이(玩具人形劇)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의 인형극으로 발전하던 과정의 것으로 볼 수 있을 뿐, 극(劇)으로서의 체계를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방면의 논고로 송석하의 「조선민속개관」(新東亞, 1935, 12월호~1936, 8월호 所載) 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추천(鞦韆)이 있고 인형극, 가면극의 상연(上演)이 있고 관불(灌佛)의 불교의식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하나는 인형극 분야에 속할 영회극(影繪劇․影燈, Shadow play)이라 할 것인데 …(중략)… 영회극은 세계에서 생고(生呱․Java) 이외에는 거의 예를 현재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데 조선의 그것을 …(중략)… 중국을 거쳐 수입된 것이라 하겠는데 그 단안(斷案)은 물론 훗일(後日)에 남길 문제라 하겠다…. 이상은 경기도 개성(開城)지방의 를 소개한 것으로 영회극이 놀아졌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인형극과 관련시켜 생각되어지는 것으로는 신라의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로서 잡기(雜技)와 가무백희(歌舞百戱)의 다양한 종목 중에는 영회극인 만석중놀이와 유사한 것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밖에도 하나의 과제로 남는 것은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무대(布帳舞臺)와 같은 연희공간(演戱空間)에서 놀았다는 발탈(足탈)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을 인형놀음으로 보느냐 탈놀음으로 보느냐도 문제이고 현재로서는 그 연희기능을 가진 분이 연로하여서, 이 놀이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내기가 힘든 형편이다.
꼭구각시의 어원
꼭두각시놀음은 일명 ‘朴僉知 놀음’이라 하고, 또는 ‘洪同知 놀음’이라고도 하나, 일반으로 널리 불리워지기는 ‘朴僉知놀음’이다. 이 명칭은 이 극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들로서 전부 인형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놀음’은 동사 ‘놀다’의 어간 ‘놀’에 어미 ‘음’이 붙어서 명사가 된 말이다. 朴僉知의 朴은 그 인형이 박으로 만들게 되고, 또는 나무를 파서 만들어진 데서 바가지의 박과 그 음이 같으므로 해서 그 인형을 인격화하여 姓의 朴에다 官名의 첨지를 붙여 朴僉知라 부른 것이고, 洪同知의 洪은 그 인형이 붉은 紅인데서 紅과 姓의 洪이 그 음이 같으므로 해서 이것 역시 그 인형을 인격화하여 官名의 동지를 붙여 洪同知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첨지와 동지는 모두 이조의 官名으로, 첨지는 첨지중구부사의 준말로 중구부의 正三品 벼슬이요, 동지는 동지중구부사의 준말로서 중구부의 從二品 벼슬인데, 첨지는 각문 출신은 그리 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벼슬은 대개 나이가 많은 늙은이들이었으므로 해서 세상에서는 왕왕 벼슬을 하지 않는 늙은이를 부를 때에도 상대를 존대하여 첨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꼭두각시의‘각시’는 젊은 부녀자인 새 색시 곧 신부를 가리켜 각시라고 하나, 얼른 이해할 수 없는 것은‘꼭두’이다. 이 미분명한‘꼭두’에 대하여 약간 구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절의 목적이다.
꼭두각시 놀음의 기원
꼭두각시 놀음>은 우리나라 전래의 민속인형극,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현재까지 전래된 민속인형극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일명 ·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주인공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은 과거 봉건 시대부터 개화기까지 떠돌아다니던 직업적 유랑연예인들인 남사당패에 의하여 연희 되었으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다. 삼국 시대에 대륙으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농경의식의 하나인 농악굿놀이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인형극의 발생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독일학자 피셸(Pischel)이 을 쓴 이래 인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류모채 등 중국학자들에 의해서 중국의 장례의식에서도 인형을 썼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인도와 중국에서 각각 발생했다는 학설도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은 중국대륙으로부터 전래된 인형극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인형극은 이미 삼국시대의 고구려악에 있었고, 그것은 중국을 거쳤거나 혹은 직접 북방을 거쳐 수입된 서역악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은 주로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중남부일대에서 남사당패에 의해 많이 공연되었는데, 현존하는 연회자들의 본적도 대부분 경기, 충청, 전라도이다. 그러나 에 나오는 인물 중에 평안감사, 황해도 영노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놀이가 해서와 관서지방과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이 극본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최근까지는 산대도감계통극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이규보의 에서 인형극의 내용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에 어느 정도의 극본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꼭두각시놀음의 어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등의 명칭보다는 실제 이 놀이의 연희자들은 라 부르고 있다. 남사당패 6가지 놀이의 순서는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짜여지는데 그 마지막 순서로서 꼭두각시놀음이 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남사당패 출신 연희자들에 의하면 덜미란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데서 비롯되었다하며, 필자의 경험으로는 실제 공연장에서 보면, , 가 상용어로 되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의 인형을 담는 괴짝은 덜미고리이고 꼭두각시놀음의 무대막(舞臺幕)은 덜미포장이다. 실제로, 연희자들 사이에서 덜미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다. , , , 등을 들 수 있다. 이 꼭두에 각시가 혼성(合成)하여 꼭두각시가 되었고, 뒤에 붙은 은 의 어간 에 어미 이 붙어서 명사화(名詞化)한 것으로 생각된다.
꼭두각시놀음의 기원과 유래
꼭두각시놀음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유랑광대패인 남사당패에 의해 연행되었던 인형놀이의 하나이다. 꼭두각시놀음을 연해했던 남사당패들은 이 놀이를 ‘덜미’라고 불렀다. ‘덜미’라는 명칭은 광대들이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조정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인형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과 민속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개국의 시조를 신으로 받들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나무 인형을 만들어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인 신묘에 제사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 민속에 관한 기록에서도 우리나라의 마을제에서 사용된 신목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여러 지역에서 신으로 모시는 서낭대를 남녀의 형상으로 치장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과거 우리나라의 인형은 여러 가지 의미와 기능과 역할을 복합적으로 지니 채 전승되어 왔다. 인형은 처음에는 신앙적. 종교적 의미와 기능을 지닌 실용적인 성격이었으나, 유희적, 오락적 기능을 지닌 인형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꼭두각시놀음은 현재 전승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자만 그 유래는 고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문헌에서 고려 시대의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연행되었던 산대잡극 중에 인형놀이의 일종으로 추정되는 꼭두각시놀음이 있었던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는 인형놀이가 상당히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한 극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던 고려 시대의 인형놀이는 조선 시대로 전승되면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탄탄한 극적 구조를 갖추면서 한층 발전된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내용면에서도 양반의 몰락과 상인 계층의 대두, 불교의 타락과 유교 사회의 폐단,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 등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오늘날의 내용과 형식을 갖춘 꼭두각시놀음으로 완성되었다.
경극의 역사
원(元)나라 때의 잡극(雜劇:元曲)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친 300년 동안은 쑤저우[蘇州] 곤산(崑山)에서 일어난 곤곡(崑曲)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왕후 ·귀족의 위안물이 되고 형식에 치우쳐 쇠퇴하게 되자 18세기 중엽(청나라 중기)에는 많은 지방극이 앞을 다투게 되었다. 그 무렵 안후이성 ·후베이성 등 양쯔강 연안지방에 남곡(南曲)의 익양강(陽腔) 계통을 이은 이황조(二黃調)가 성행하여, 안후이성의 여자역 남자배우 고낭정(高朗亭)의 일단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왔다. 이때가 1790년 고종(高宗:乾隆帝)의 80세 생일축하 잔치가 벌어진 해이다. ‘휘반(徽班)’이라는 안후이성 극단이 당시 난해하고 장황한 저음인 곤곡에 비하여, 명랑하고 쉽고 동작이 많은 이황조를 상연하자 곧 대중의 호평을 받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신흥극종(新興劇種)인 데다가 형식상의 융통성도 있던 당시의 이황조는 곤곡을 비롯한 많은 선행 극종의 기술과 형식을 최대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창극의 역사와 발전과정
한국의 전통 오페라라 할 수 있는 창극은 개화기 이후에 판소리가 서양극의 영향을 받아 새로 만들어진 공연 양식으로 시대적 요청에 따라 듣는 것과 보는 재미를 가미하여 만들어진 한국식 전통 오페라라고 볼 수 있다. 창극은 연극처럼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배역에 따른 음악과 노래, 연기의 즉흥적 표현이 춤과 관현악단의 반주와 결합된 진정한 형태의 종합예술이다.
경극의 역사와 발전과정
한의(漢醫), 중국화와 함께 중국의 3대 국수(國粹)로 불리는 경극은 중국의 전통 연극 중 가장 대표적인 민중극으로 일찍이 한 대인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희곡이라 할 수 있는 초기 연극 형태가 존재하여 노래, 춤, 잡기, 씨름, 각투 등과 함께 궁중의 오락물로서 서민에 의해 장터에서 공연되었다. 시대에 따라 내용과 형식을 지니면서 발전해 오던 중국 연극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각기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된 공연물들이 고도의 품격을 지니게 되면서 등장한 시대적 희곡이 바로 경극인데 이러한 경극은 창(唱, 노래), 과(科, 연기), 백(白, 대사)의 삼위일체를 요구하면서 춤이 곁들여지는 종합 무대 예술로 북경에서 집대성되어 그 지명인 ‘京’룰 붙여 京劇이라 불리어 졌으나 그 실제로는 남곡(南曲) 계통으로 남방에서 북경으로 유입되어 경극이 되었던 것이다.
가부키의 역사와 발전과정
가부키는 창시 이래 배우중심으로 발전해 온 연극으로 배우의 기예와 그 모습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은 각본, 연출을 통해서이며 특히 분장이 배우에게 자신을 무대에서 최대한 살리는 요소였기 때문에 적어도 에도 시대에는 분장에 대한 책임은 배우 자신에게 있었고 따라서 배우는 연기는 물론 자신이 연기할 의상, 분장, 가발까지 고찰하고 연구하는 일까지 마다 않았다. 가부키는 관객을 즐겁게 하고 배우들이 솜씨를 마음껏 펼치도록 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권선징악으로 대표되는 교훈적 요소가 들어있으며 새로운 형식들을 쉽게 흡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식화된 연극으로서 신사나 절에서 공연되던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많은 관례들을 계속유지하고 있다.
경극의 정의
경극은 중국 희곡 중 하나로, 대극 혹은 국극이라 불리며, 한의학, 중국화와 함께 중국의 3대 국수로 여겨지고 있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 경극은 북경을 중심으로 발달되었고, 중국 각지에서 전해오는 360여종의 희곡 장르 중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창극 예술이다. 서양에서는 Beijing Opera라 부르며 음악의 한 장르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경극은 중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고 가장 대표성을 띤 극의 종류로 전신은 휘조(안휘성에서 유행되던 곡조)인데 통칭 피황극이라 부른다. 한때 평극이라고도 불렀다가 후에 경극으로 고쳤는데 약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청조 건륭 시기에 휘조가 북경에 진입해 곤강(하북 북경 일대에 유행했던 곡조)과 진강(진섬서성 일대에 유행했던 곡조)의 극내용, 음악곡조, 표현방법 등에서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발전한 것이다. 표현면에서 춤과 노래가 동시에 진행되고 기교가 있으며 허의성의 동작을 많이 사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등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인 동시에, 서양의 공연예술과는 달리 이러한 다양한 예술적인 요소를 사실적이 아닌 상징적 원리 아래 세련시켰다는 점에서 최고의 약속적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경극을 희곡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관극하는 것을 청희라고 한다. 이것은 보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희곡은 극도로 양식화되어 있고 지키고 따라야 할 요소가 많다. 우선 창(노래), 과(연기), 백(대사)의 삼위일체를 요구하면서 춤이 곁들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경극의 배역
경극의 배역은 남녀노소(男女老小), 준축정사(俊丑正邪)에 의해 크게 생(生:남자역), 단(旦:여자역), 정(淨), 축(丑:어릿광대역)으로 구분되고, 이것을 4대 행당(四大行當)이라고 한다. 배우는 전통적으로 여러 배역을 맡지 않으며 일생동안 하나의 배역만을 연기한다. 그리고 정과 축의 배역은 얼굴에 검보라는 분장을 행하며 가면은 착용하지 않는다. 단의 배역은 원래 여자가 맡지 않고 남자가 맡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후에 이러한 관례가 폐지되어 버렸다.생의 배역은 다시 노생(老生:중년 이상의 남자역), 홍생(紅生:삼국지의 관우처럼 문무를 겸하는 배역으로 빨간색의 분장을 하고 긴 수염을 내려뜨린다), 무생(武生:무술을 행하는 남자역), 소생(小生:청년역), 왜왜생(娃娃生:어린애역)등으로 세분되며 단의 배역은 정단(正旦:靑衣라고도 하며 항상 검정옷을 입고 있다.), 화단(花旦:色女의 역할), 규문단(閨門旦:처녀역), 도마단(刀馬旦:무술을 행하는 여걸의 역할), 노단(老旦:노파역)등으로 세분된다. 정의 배역은 동추화검(銅錘花瞼:얼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려 넣은 역할), 가자화검(架子花瞼:하얀색이나 검정색의 분장을 행하는 악한역), 무정(武淨:무술을 전문적으로 행하는 역할)등으로 세분되며,축의 배역은 관리를 연기하는 문축과 무술을 행하는 무축으로 구분된다.
경극의 유래
경극은 중국의 모든 전통극 예술형식 가운데 가장 대포적인 것으로 수세기에 걸쳐서 예술가들이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중국의 독특한 공연 예술이다. 경극은 양자강 연안 지방에서 시작되어 북경에서 완성되었고, 중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고 대표성을 띤 극의 종류이다. 경극의 전신은 휘조(안휘성에서 유행되었던 곡조) 인데, 통칭 피황극이라 부른다. 한때 평극이라고도 불렀다가 후에 경극으로 고쳤는데 약 2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등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인 동시에, 서양의 공연예술과는 달리 다양한 예술적 요소를 상징적 원리 아래에서 발전시켜왔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중국 고유의 전통적인 종합무대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경극의 기원과 유래
중국의 수도 북경의 이름을 빌어 불리게 된 경극의 기원은 원(元)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나라에는 잡극(雜劇)이라는 극이 있었다. 잡극은 점차 발전하면서 명나라와 청나라를 걸쳐 300년간 곤곡(昆曲)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그 후 한극(漢劇, 중국의 호북성 무한에 있는 극의 일종)의 창(唱)을 흡수하면서 휘극(徽劇)으로 발전되었다. 휘극은 주로 삼국지와 같은 역사극을 공연하는 지방극(중국 안휘성)이었다. 이때에 지금의 경극과 같은 진한 분장을 했었다. 그러다가 휘극을 공연하는 휘반(徽班)이라는 단체가 북경으로 들어와 공연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황실 문인들의 문학적인 가공을 거치며 분장이나 의상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이처럼 경극은 중국 각 지방에 떠돌던 100여 종의 전통극 중 하나로, 다른 극과 조화를 이루어 오늘과 같은 형태로 발전해 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경극을 희곡(戱曲)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관극 하는 것을 가리켜 청희(聽嬉)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