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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Classicism)의 정의

이 명칭은 광의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문예작품을 모범으로 하여 그것을 계승하려는 모든 예술경향을 말한다. 이 광의의 고전주의에 포함되는 르네상스 양식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로부터 16세기 또르꽈또, 따쏘가 죽기까지 계속되며, 이것이 각국에 전파되어 영국에서는 모어(Thomas More), 프랑스에서는 라블레(Francois Rabelais), 롱사르(Pierre de Ronsard), 몽떼뉴, 독일에서는 루터(Martin Luther), 플란더스에서는 에라스무스(Disderius Erasmus) 등이 각기 대표된다. 이것은 중세의 종교적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 고전의 정신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성의 확립을 꾀하는 혁신운동으로, 인문주의(Humanism)라고도 불린다. 그 후 17세기 전반에 조형예술을 선두로 예술전반에 걸쳐 출현한 바로크 양식은 문예에 있어서도 이탈리아의 마리노(Giambat-tista Marino), 스페인의 공고라(Luis de Gongora y Argote), 독일의 그리피우스(Andreas Gryphius), 그림멜스하우젠(Christo-ffel Grimmelshaussen) 등의 작품에 나타났다. 그 특색으로는 피안에의 희구와 현세주의, 금욕과 향락주의, 신의 뜻과 자연 등 상호모순 되는 요소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병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흔히 억압된 감정의 격발, 속박이 풀려진 공상의 표출로 해석된다. 바로크도 후기에 이르면 과장된 표현, 비유의 과잉, 현학취미 등, 피상적인 면에만 국한된 천박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본래의 정신적 약동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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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신 고전주의는 낭만주의의 한 분류로서 1750년경 후기 공간적 특성이 주가되는 바로크나 로코코에 반항하여 자연의 원리와 법칙에 기반을 둔 명확한 기하학적 질서를 창조하려는 의도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바로크 건축에 대한 반동이 로코코 양식을 만들었다고 보나 정상적 양식의 확립을 지향했던 로코코 양식이 지나친 장식의 경향이 되자 근대 문화로 향한 대세 속에 사회 전체가 요구했던 진실 추구는 고전주의로의 복귀를 유발하게 되었다. 또한 17세기말에서 18세기까지 있었던 유적의 발굴과 고건축의 고증적 재발견은 극단적으로 수다스러웠던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성이나 반발을 뒷받침할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즉 르네상스 건축과 마찬가지로 신 고전주의도 고전 부흥을 외치며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원인 외에 실제적인 발생 배경은 1725년 피셔 폰 에를라흐가 동서양의 모든 건축을 묘사한 「건축역사도감」을 발간하면서이다. 이 도감이 발간된 후 피셔의 후대 건축가들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앞으로는 세계건축의 역사라는 배경에 의해서 평가되고 비평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로 모든 건축가들이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즉 건축가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과거의 업적과 비교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사를 살펴보면 이집트, 그리스, 로마, 로마네스크, 고딕 이후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로코코 그 뒤 근대의 건축까지 이전 건축양식의 반항으로 새로운 건축이 발생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함을 안 건축가들은 세계 건축사라는 배경에 의해서 비평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며 이에 대한 대응책을 찾기에 이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건축의 근원을 찾고자 했으며 그럼으로써 그 속성을 어느 누구도 그 선택에 도전을 할 수 없는 기본적이 고 원초적인 건축을 찾아내려 한 것이 바로 신 고전주의가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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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음악의 정의

이러한 시대상황에 따라 음악은 간단하고 선명하면서도 솔직한 선율을 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화성적인 반주로 뒷받침하는 단성음악(Homophony)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또한 규칙적인 형식미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형식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모든 형식이 어떤 일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통일을 유지하는 범주에서 변화 발전시켜 가는 논리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의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소나타 형식인 것이다. 이러한 고전주의(Class icism)바흐의 아들들과 요한 슈타미츠(1717 ~ 1757)를 대표로 하는 독일 만하임 악파의 작곡가들이며 더욱발전시킨 사람은 글룩,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른바 빈 악파라고 하는 대가들이다. 만약 고전주의라는 말을 "당시의 전통적인 형태의 고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말은 비엔나 악파의 작곡가들(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게는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통을 고수하는 데에 집착한 것이 아닌 새로운 음악 형태를 찾아내기 위해 대담한 시도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18세기 중엽의 시인들과 미술가들처럼 정서적 표현에는 무관심한 채 형식적 규칙에만 열중하였다면 그들을 고전주의 음악가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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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체의 개념

미국의 사회학자 W.F.오그번이 《사회변동론(社會變動論)》에서 주장한 이론이다. 한 사회의 문화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문화변동의 속도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2가지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나, 실제로는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변화가 앞서기 때문에 정치 ·경제 ·종교 ·윤리 ·행동양식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나 가치관의 변화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의 변동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현상이 야기된다. 예를 들면, 현대의 도시문명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전통적인 농경생활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차량의 수와 에너지의 소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통질서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며 생태계 보전을 위한 노력이 결여된 소비문화가 여전히 도시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등 전통사회에서의 의식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이런 문화지체현상과 함께 도시는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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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레프트의 의의

카피레프트는 원저작자의 의도와 다수대중의 권리조차 거스르는 저작권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으로, 새로운 디지털 공간과 정보소통에 대해 대중이 통제권을 가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지식의 기반과 지식의 확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카피레프트의 선구자들은 지식과 노하우가 특정 권력에 독점되는 것보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편이 다수에 의한 비판과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통해 삶의 진보를 앞당긴다고 믿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보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창조와 자아실현의 욕구, 더 나아가 소수의 전문가가 아닌 다수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신뢰였던 것이다. 정보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면 잠재적 창작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의 창작욕구나 창의력이 오히려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우리 사회의 지나친 단속으로 선의의 접근과 이용을 막는다면 창작을 견인할 수 있는 생각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즉, 디지털 사회에서 웹은 소수의 기업이나, 개인을 위한 도구가 아닌 공공재이다. 또한 인터넷 활동의 최고 미덕은 상호간 정보공유이고 그것이 오늘날 사회를 이만큼 발전시킨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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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특징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 음악이라고 불리 우는 아르스노바의 탄생이후 두 번째의 신 음악이 탄생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 음악은 1600년경에 시작되어 1750년 바흐의 죽음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의 음악에 적용되는데,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대를 음악사에서는 바로크(baroque)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시대의 그림과 건축에서 엿볼 수 있듯이 풍부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처리방법을 특징으로 한 것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 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 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 일그러진 진주, 또는 비뚤어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칼 어의 "barroco"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균형감과 형식미를 존중하는 르네상스 미술에 대립된다고 보고 가치를 저하시키는 의미로 쓰여졌었다.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 한다. 1600년 ~ 1750년의 기간은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서 시민문화의 시대로 접어든 변화와 모험의 시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는 근대 민주국가의 사조가 예기되면서부터 전제군주제가 강화되었고 , 종교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상충되는 조류사이에서 개인주의 관념이 촉진된 시기였다.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강조한 것으로 음악 자체보다는 무대장치나 의상이 강조되는 궁정 오페라, 중상주의 시대의 부산물인 상업 오페라, 그리고 중산층 오페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루이 14세는 왕립음악원을 설립하는 등, 프랑스 오페라 중흥을 위해 대대적인 제도화 작업을 착수했다. 책임자로 륄리를 두었는데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되는 프랑스식 오페라 양식을 개발하는 등, 루이 14세의 비호 아래 프랑스 전역의 음악생산과 소비를 한정, 통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현저하게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바로크시대의 개신교 문화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 개성의 강조는 개인적인 풍토를 조장하여 바로크에서 낭만적 경향을 강화했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음악 작곡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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