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내 검색

십자군 전쟁의 배경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된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리며,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잃을 지경에 이르자.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한다는 과장된 주장을 하여,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함으로서 발단되어. 11세기 말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소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서방 기독교도들의 군사원정이다. 이는 성지 탈환과 수호의 명분으로 감행된 전쟁으로,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면서 동방과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군사원정으로 약 200년에 걸쳐 일어난다. 이때 셀주크 투르크족은 1055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성하여 소아시아 대부분을 정복하여, 1078년 예루살렘과 1084년에 안티오크를 함락하고 성물과 순례자들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서유럽 기독교권과 소아시아 이슬람권 사이의 무력 충돌을 부추겼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1세가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기 위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지를 탈환하라는 연설로 민중과 교회를 선동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교황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교황권의 확립과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로 통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 > 세계사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이전까지의 미국의 역사

유럽의 백인들은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이후에 파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몰려들게 되었다. 아메리카 지역에 건설된 영국인 최초의 영구적인 정착지는 1607년에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세워진 교역소였다. 이곳은 나중에 담배의 재배 및 수출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또한 1620년에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의 종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군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이후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거나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거나 신대륙으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은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메릴랜드, 로드아일랜드 등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잉글랜드 왕의 특허를 얻어 식민회사를 설립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버지니아 이남 지역에도 몇몇 자치주가 설립되었고, 1732년 무렵이 되면 북아메리카의 동해안 일대에 13개의 영국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영국 정부는 원칙적으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하여 본국의 법률을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건전한 방임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1763년에 7년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 영국 정부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중상주의 정책을 통하여 간섭을 강화하고 갖가지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식민지 대표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원칙을 확인하고, 강력한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결국 식민지 대표들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공포하였고, 수 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승리하여 1783년의 파리조약에서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역사 > 역사일반

비인간화와 기독교교육

지금 현대 사회가 비인간화되어 가는 원인들 가운데 우리 기독교 교육이 왜곡된 신앙교육을 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교육은 교육현장에서 전도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두 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기독교라는 본질적인 실체를 궁극적으로 형상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방법론적으로는 기존의 신화적, 구복적, 주술적 형태로 해석하고 있으며, 교육적 접근을 시키고 있다는 것, 둘째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을 마치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속적인 교육철학과 뭉쳐놓은 예컨대, 마치 중세 종교 철학적인 해석으로써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 학교 구외의 종교단체에서는 이러한 신학적인 전문가들의 이론적인 근거에 의해서 기독교 교육적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받는 곳은 신앙적 비판력이 가장 부실한 중·고등 기독교 학교의 교육현장이다. 기독교 교육 현장에서 종사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 교육을 위한 도구 및 자재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 수용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요, 뜻이라고 칭한다. 문제는 그러한 모든 일들이 맹목적인 주술적, 미신적인 행위 그리고 타학문과의 유사한 종교 과학적 행위에 속한다면,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인 것이다. 물론 현재 행해지고 있는 모든 기독교 교육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적이 선하며 진리에 대한 자유를 함께 향유하고자 애쓰고 있는 기독교사들의 헌신을 통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따뜻한 품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만 기독교 교육의 방법론적 모순을 재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무신앙의 솔직성 때문에 소외 받는 학생이 더 이상 나오게 해서는 안 되겠다.

역사 > 역사일반

무신난

고려는 문무양반체제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면서 실제는 문반이 국가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숭문천무사상이 무신의 불만을 증가시켰다. 또한 무신의 지위향상에 따른 하나의 폭발이었다. 무신난은 현종 5년 때이며, 김훈과 최질의 난이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중부의 난(경인난)으로 정변이 발생하였고, 중방을 권력기구로 삼아 무인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 무신정변의 근본적 배경은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에 의한 지배체제의 동요와 지배층 내부의 갈등심화이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과가 없었다, 둘째, 무신교육기관인 강예재(무학재)가 인종 때 폐지되었다. 셋째, 제도적으로 무반은 정 3품인 상장군이 최고의 관직이며, 그 이상의 승진이 어려웠다. 넷째, 무신의 최고 합좌기구인 도병마사가 중방보다 우위이다. 끝으로 문신들은 고위 무관직을 겸직하고, 군대의 최고 지휘통솔권은 문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은 모두 문신이었던 것이다. 무신정변의 의의는 정치적으로는 문벌귀족사회의 붕괴로 관료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문반과 무반사이의 신분적 차이가 없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전시과의 붕괴 그리고 사전과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다. 사회적으로는 낮은 신분층이 높은 신분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고려전기보다 훨씬 증가되었고 신분의 하강이동도 상승이동에 못지 않게 많아졌다.

역사 > 한국사

무신정변의 발발 당시 고려의 상황

무신정변의 발발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의종은 문신들과 연회를 자주 열어 향락을 즐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의종이 나라 재정을 돌보는 데 소홀하고, 국가에서 고위관직을 지내고 있던 여러 문신들의 비리와 세금수탈로 인해 백성들이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종이 국정에 소홀해 지고 향락에 눈이 멀자 자연스레 왕권은 약화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져 민심이 흉흉해졌다. 무신정변의 발발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당시 문신과 무신의 사회적 차별이었다.고려의 관진 체계는 크게 문반과 무반의 양대 체계로 짜여져 있어 그리고 원칙상 문무 교차 즉, 문반이 무반 직을 맡거나 무반이 문관 직을 맡는 것은 불가능 했다. 무반은 정3품 이상의 무반 직이 없었기 때문에 상장군을 최고로 더 이상 승진할 수가 없었다. 2품 이상의 재상 급 관료들을 재추(宰樞)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도당(都堂)이라는 국가 최고정책을 결정하는 기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품 이상의 관직은 문반에서 독점하였기 때문에 무반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국가 간의 전쟁이나 내란과 같은 유사시에도 최고사령관직은 문반에서 맡았다. 거란족이 쳐들어왔을 때 상원수로 총사령관을 맡았던 강감찬 장군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대표적인 문신이었고,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지방에 9성을 쌓은 윤관 역시 문신이었으며,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군 총사령관 또한 문신인 김부식이었다. 고려시대 군인들은 군인전을 받고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 군인전이 정상대로 지급되지 않아 생계가 위태로워졌다. 그러다 어쩌다 지급된 군인전마저도 권력자에게 탈점당하면서, 결국 군인들은 무신들의 불만에 함께 동조하여 무신정변의 연장선을 이루는 축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나라는 혼란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종대 무신정변”으로 이제부터 이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 > 한국사

임오군란의 배경

강화도조약 이래 민씨일파와 그 추종자들의 자주성 없는 대일정책은 국내 인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을 대두시켰다. 그리고 위정척사의 상소와 그것에 대한 민씨정권의 탄압책은 대원군의 재등장을 기대하는 풍조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민씨일파를 비롯한 특권관료들은 뇌물과 매관매직으로써 점차 살쪄 갔으며 외국 상품에 자극되어 그 사생활은 사치를 극하였다. 더구나 일본과의 무역에서 주된 수입상품은 면포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면작 및 수공업적인 면직물 제조업이 쇠퇴하였다. 반면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사모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주로 쌀, 대두 등의 식량이었다. 그리하여 국내에는 식량 위기가 조성되고 곡가는 강화도조약 이래 3~4배 급등하는 현상을 빚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곡가가 물가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물가상승은 도시경제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를 시장을 통해 구입하여 생활하는 도시민,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생계를 직접 위협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이익에 민감한 일부 특권상인들이 미곡의 수집․중계와 양화의 유통과정에서 성장하게 만든 반면, 도시 하층민들에게 집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또한 개항 이후 일본세력의 침투에 따른 조선사회 내부의 변동은 하급 군병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민씨 척족정권과 개화파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군제개혁을 추진했는데,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일본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역사 > 한국사

종군위안부의 뜻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1943년 이후엔 여자정신대 혹은 여자근로정신대에한정해서 쓰이는 경향이 나타나다가 마침내 1944년 8월에 이르러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지게 된다.이후부터 정신대란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원래 다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 두고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오로지 정욕만을 채우는 곳이었다.-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 체계적으로 성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강제 동원된 여인들은 위안소에 배치되어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고 불리어졌다. 하지만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은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을 내포하고 있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국제적으로는 '성노예' 또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면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현재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매스컴을 통해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인 '정신대'는 이름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의미로 썼던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40년대의 신문기사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여자들에게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자근로정신대'를 의미했다. '여자근로정신대' 중에서 다수의 여자들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로 이용되었기에 '정신대'와 '위안부'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쓰이게 되었으나 정확히 따지면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다.

역사 > 한국사

아편전쟁과차

차가 원인이 된 두번째 세계적인 사건은 아편전쟁(1839)이다. 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 목화와 아편(19세기에는 아편은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 이었다.)을 중국으로 밀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당시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도자기 비단등을 수입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또한, 18세기 영국 정부가 차에 대한 수입관세를 인하하자 일반 국민 사이에도 널리 차가 보급되어 차의 수입이 급증하게 된다. 더불어, 아편은 인도의 재정 안정에 큰 비중을 차지 하였기에 아편무역이 중단되면,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는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를 통해 중국에서 얻은 은이,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인도를 연결하는 세계 무역수지의 중요한 결제 수단이었기에, 영국은 아편무역을 수호하고 합법화할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중국의 입장에서는 관청, 특히 군대에 아편 중독환자가 급증하여 청나라 조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의식에 청나라 황제는 강경론자인 임칙서(林則徐)를 흠차(欽差:全權)대신으로 임명하고,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의 밀수를 근절하고자 한다. 이에 양국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니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전쟁 기간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520명, 청조의 사상자는 약 2만명에 이르고, 청조는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난징조약(南京條約,1842)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로 중국은 전후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 아편 거래에 의한 국부의 유출, 점차로 국내 산업을 압박해오는 외국 공업제품의 파격적인 공세에 더하여, 전제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 등으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처럼, 우습게도 미국독립의 시작과 아편전쟁은 이처럼 인간의 탐욕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 이득 앞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위해 인류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잘살아 보세"가 지고지상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선각자의 지혜를 실천하여 이웃과 나누며 사는 덕목이 필요하다.

역사 > 역사일반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발전

일본에 닥친 19세기의 서양의 충격은 우선 해외통상의 개방을 그리고 이어서 1868년에는 토쿠가와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1868년에 권력을 장악한 새 지도층은 일본을 급속한 근대화의 길로 올려놓기 위하혀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과 근본적 개혁을 도모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사건들의 전개가 ‘메이지유신’으로 알려져있다. 가마쿠라막부 시대 이래 이원적인 정치제도를 타파함으로써 일본은 새로운 국가적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천황은 이 결정적 순간에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서양의 충격에 대한 일본의 최초의 반응은 ‘복고’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다.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 하나의 왕정복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천황은 여전히 정치기구와 권력투쟁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독특한 형태이기는 하나 국민적 신뢰의 직접적 근거로 천황의 지상권(王政)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해온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국가를 외국으로 부터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게끔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을 채용했다. 이 슬로건 아래 1871년에 이르기까지 다이묘오는 소유지를 몰수당하고, 무사계급은 폐지되었으며, 사회적 평등과 개인행동의 자유가 선포되는 등 일본을 서양 수준에 맞추어 재창조하려는 전력을 기울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로의 이행의 출발점이었으며 따라서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중추적인 사건의 하나가 된 것이다.

역사 > 역사일반

메이지유신의 정의

일본 메이지 왕[明治王] 때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변혁과정으로 이는 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전야인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과정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 ․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 병합한 것이다. 이러한 군국주의의 종말은 1937년에는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유발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45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을 스스로 자초하게 되었다.

역사 > 역사일반

비엔나협약의 도입목적

매매계약은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간의 물품 매매 거래에 있어 당사자들 간에 분쟁 발생시 그 분쟁이 국제사법에 따라 결정되는 국내법의 적용을 받을 경우에는 매매당사자들에게 법적 확신뿐만 아니라 통일성을 주지 못하게 된다. 매매계약을 규율하는 각국의 법률은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 같은 내용의 매매계약에 관한 법 규정을 두고 있는 국가들도 그 해석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률상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 각도에서 추진되어왔는데 첫째, 국제무역매매의 재판 관할권에 관한 각국의 법률이나 섭외사법을 통일하자는 노력이 국제사법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둘째, 국제거래에 적용될 사법의 일정분야데 대한 각국의 법률을 통일하자는 노력이 있었지만 국내법 개정문제 등으로 그 이해관계 조정이 매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셋째, 각국의 국내법은 그대로 두고 별도의 국제거래에만 적용되는 법규를 제정하여 이에 가입한 국가간의 거래나 채택한 당사자들 간에 그 규정을 적용하자는 노력의 일환으로 i)ICC Incoterms (1936년) ii)Vienna협약(1980)등이 제정되었다. 이들 법규는 각국 국내법은 그대로 두고 국제거래 적용법규를 별도로 마련하여 임의선택토록 하였기 때문에 각국의 이해관계를 원만히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엔나 협약은 국가에 관계없이 국제물품거래를 위한 통일법으로서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다. 2004년 10월말 CISG 협약에는 63개국이 가입해 있다. 우리나라의 주요 교역국가인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이태리 프랑스, 캐나다, 칠레, 아르헨티나, 멕시코, 스페인, 스위스 등이 이미 CISG 협약에 가입해 있으며 일본과 영국은 아직 미가입 상태이다. 우리나라는 2005년 3월 1일 드디어 비엔나협약에 가입함으로써 체약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역사 > 유럽사

콩고분쟁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

기존의 콩고공화국과 자이르는 콩고왕국에 속했으나 19세기말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콩고강을 중심으로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콩고 강 서쪽지역(현 콩고)에는 프랑스가, 동쪽지역(구자이르, 현 콩고민주공화국)은 영국이 각각 점령하였다.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샤는 당시 영국 탐험가 스탠리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1885년 콩고조약에 의거 동쪽(구자이르지역)은 벨기에령으로 서쪽(콩고)은 프랑스가 1960년 독립 당시까지 각각 지배하였다. 양국은 브라자빌 콩고(현 콩고)와 레오폴드빌콩고(구자이레)로 각각 불리다가, 1971년 집권한 동 콩고의 모부투 대통령이 국명을 자이르로 부르기 시작했다. 1997년 5월 내전을 통해 새로 권력을 잡은 카빌라가 국명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DRC)으로 변경하였다. ▷ 콩고분쟁의 개요 - 32년간 독재 정권을 유지해 온 모부츠 정권과 이에 대항해 온 카빌라 반군 세력간에 정권쟁탈을 둘러싼 분쟁. - 1965년 이후 집권 해 온 모부츠 독재 정권이 냉전 종식으로 강대국의 지원이 사라지자 세력이 약화됨. - 1994년 르완다 내전으로 유입된 후투족 중심의 구르완다 정부군과 후투족 민병을 이용하여 동부지역의 투치족계의 바냐물량게족을 탄압함. - 1996년 이에 반발한 범반정부 조직인 ADFL가 결성되어 모부츠 정권 무력충돌을 개시함. ADFL은 투치족 르완다군의 지원하에 1997년 5월 모부츠 정권을 붕괴시킴. - 집권한 ADFL의 카비라 의장이 국명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개명하고 대통령에 취임. - 카빌라 대통령은 르완다 난민 20만명의 실종과 관련 유엔측의 조사를 받고 있음. - 카빌라는 반정부 세력탄압으로 서방측의 비난을 받음. - 1998년 2월 반군 조직의 공격이 증가되는 가운데 7월 돌연 자신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의 철수를 요구. 르완다 투치족은 반군에 합세 카빌라를 공격, 내전 격화됨. 동 분쟁은 인종문제, 난민문제, 상호반군 지원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주변국들이 정부군과 반군편으로 나뉘어 개입함으로써 국제전화('아프리카의 1차대전'). '98-2000년간 주변국, 유엔, 남아공, 리비아 등 중재노력에도 불구 격렬한 전투지속 Ⅱ) 직접적 원인 - 동 분쟁은 독립 이후 지속되어 온 내전이 일단락 된 뒤 이웃 르완다와 부룬디의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 간 대립에 직접적으로 연루되면서 확대된 분쟁이다. 부룬디와 르완다에서 투치족이 후투족을 박해하자 후투족들은 죽음을 피해 자이르로 피난하여 난민촌을 형성했고, 이들 난민들은 자이르를 거점으로 한 게릴라를 형성해 부룬디와 르완다를 공격하였다,

역사 > 아프리카사

고대 로마시대 건축

고대 그리스 건축이 건물의 내부보다는 외부공간에 더 치중하였던 것에 비해 로마시대의 건축은 에투루리아인의 건축과 그리스 시대에서 이어받은 건축유산을 더욱 발전시켜 건축의 구조적, 장식적 측면을 강조하고 로마시민을 위한 다양한 실용적인 건물을 고안함으로서 로마건축의 독특한 특징을 발전시키게 된다. 로마 건축은 창조보다는 모방에 가까울 만큼 과거의 건축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건축물의 외부와 내부의 기둥장식 그리고 신전에서 보이는 형식미 등은 과거의 건축적 특성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조 및 시공 기술의 발달이 대규모 공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구조면에서는 아치형이나 궁륭식을 채용함으로써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리고 다시 그 위에 분말로 된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도입함으로써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로마 건축의 또 다른 큰 특징은 건축의 다양성이다. 신전을 비롯하여 장대한 바실리카, 극장, 경기장, 별장, 목욕장, 개선문, 기념주, 수도, 도로 등이 역대 황제에 의하여 세워졌다. 특히 로마인들은 섬세함보다는 지속적인 힘을 선호했으며 경쾌함보다는 힘을, 아름다움보다는 육중함을 , 상상적인 성격보다는 사실적인 면을 중시했다. 로마건축은 건축이라는 것이 단지 벽, 기둥, 지붕 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만들어진 공간 창조의 예술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로마 건축에서는 거의 모든 유형의 건물로부터 모든 변형이 시도되었다.

역사 > 역사일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