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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테

브라만테 (1444~1514.4.11)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본명은 Donato d’Angelo Lazzari. 국 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건축·회화 출 생 지 : 이탈리아 우르비노 페르미냐노 몬테아스드루발도 주요작품 :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재건공사(1506 개시) - 성베드로교회, 최초계획안;로마교황청의 현상설계에 당선(집중식 평면계획안) - 템피에토, 로마(1502~1513) (성 베드로의 순교지에 건립된 기념 예배당) - 성 마리아 델레 파체, 로마(1504) -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프레소 성 사티로 교회(1482년 기공;최초의 건축작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화가 우르비노 근교 출생. 1481년 밀라노궁정에서 일했으며, 현재 알려진 최초의 건축작품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프레소 성 사티로교회(1482년 기공)이다. 이것은 9세기 건축의 대개조였는데, 여기서 브라만테는 부지의 제약으로 안쪽으로 깊이 나갈 수 없는 제단부를 원근법을 구사하여 교묘하게 처리하였으며, 세밀한 부분에서는 L.B. 알베르티·F. 브루넬레스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밀라노에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으로 집중식 평면을 지향하기 시작했던 점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데,이것은 브라테가 죽을 때까지의 주제가 되었다. 건축가로서는 이탈리아의 융성기 르네상스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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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인양

1907년 건조. 영국 Whitestart社 길이 268.84m, 높이 53.25m, 폭 28.19m, 총톤수 4만6천328t 1912년 4월 14일 자정. 대서양에서 처녀항해 중이던 타이타닉호는 오른쪽 뱃머리 부위가 약 90m 길이로 긁히는 사고를 입어, 외판(外販)이 찢어지고 6개의 격벽(隔壁)에 틈이 생겨서 물이 새어들기 시작했고 한 두 시간 안에 침몰했다. 타이타닉호는 배 전체에 15개의 수밀격벽1*이 있어서 모두 16개의 수밀구획2*으로 나누어진다. 해양 사고가 발생하면 대개 충돌은 국부적인 지점에 한하므로 수밀구획은 한꺼번에 배 전체를 침수시킬 가능성을 낮춘다. 타이타닉호도 최대 4개의 구획이 침수되어도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된 배였다. 하지만 배는 빙산과 정면충돌하는 대신 옆으로 비켜가다가 빙산에 스쳐버리는 바람에 손상을 더 크게 입게 되어 충돌, 침몰하게 되었다. 침몰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는 빙산과 스칠 때 찢겨진 배의 외벽이 너무도 강도가 약했다는 것이다. 배가 빙산과 스치듯 충돌할 때, 요즘 같으면 찢기지 않고 그냥 움푹 파이면서 구부러지기만 했을 것이지만 타이타닉호의 외벽은 그냥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이는 금속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 더욱 강도가 약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오늘날의 야금학3*에서는 철강에 유황의 함량이 높을 경우 특정한 조건에서는 그냥 부서져버리는 ‘파열’ 현상이 매우 쉽게 발생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결국 황화물이 많이 들어간 철판을 쓴 탓에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살짝 스치면서 충돌하였지만, 침몰되는 결과를 안게 되었다. 1*)수밀격벽 : 배의 외부가 파괴되었을 때, 침수를 일부분에 그치게 하기 위하여, 내부를 여러 방으로 갈라 막은 벽 2*)수밀구획 : 수밀격벽에 의해 칸막이 된 선박 내부의 구획. 선박에 손상이나 침수가 생길 경우에 대비하여 선박내부는 수압을 가해도 물이 새지 않도록 칸막이를 설치, 구분한다 3*)야금학 : 금속 공학의 한 분야. 야금의 기술과 방법, 금속 재료의 성질 등을 연구하는 학문 󰋮 침몰선의 인양방법 󰋯 부양 용기를 이용한 방법 부력을 가진 물체를 침몰 선박에 단단히 고정하여 부력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이 때 사용하는 부양 용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고정식 부양 용기와 현대적인 부양 주머니가 있다. 이러한 부양 용기의 배치 및 부착 방법은 현장의 여러 가지 상황에 맞게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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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B.C. 492~479)

Ⅰ. 교과서 분석 ◇페르시아 전쟁과 아테네의 발전 세계사 (교과서, 지학사, 2003, p.53) 원인 - 6C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지중해로 세력을 확대하여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를 압박하여 이에 대항하여 아테네가 식민 도시를 지원한 것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전개 -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영향 - 아테네는 대외적으로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아테네 제국이 발전하고, 대내적으로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민주 정치 전성기를 맞았다. 지도 자료로 1차와 2차 마라톤 전투, 3차 살라미스 해전을 설명하고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교과서, 지학사, 2003, p.47) -단순히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제국이 쇄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페르시아 전쟁’ 이라는 용어 자체에서 서양의 시각을 살필 수 있다.  페르시아 사(史)를 서양사나 동양사에 비해서 적은 비중과 내용으로 실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라기보다는 그리스가 발전하기 위한 토대로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서술하였다.  일반 개설서에서는 1차 침입,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모두 기술하여 전쟁의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여 페르시아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승리를 알 수 있으나 교과서에서는 단순히 그리스의 승리로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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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비잔틴(Byzantine)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이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신수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로 천도한 33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전사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문화권을 의미한다. 수도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로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일에 이 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 서 로마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 언어, 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카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 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티움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티움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비잔티움의 사회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 학문,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 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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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분쟁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원인과 시발점을 찾아볼 수 있다. 주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하고 양 민족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다. 필리스틴은 영어로 Philistine이고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Palestine)이다. 따라서, 바로 이 시점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주전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주전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주후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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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의 사회

a. 사회 통치조직: 행정과 군사가 일치된 고도의 관료제조직. 한편 방대한 조직의 관료제를 유지인력을 공급하는 수단으로서 로마제국 이래의 속인교육이 유지되고 발달하였다. 이는 동일한 시기 서방세계의 귀족들이 대개 문맹에 가까웠던 사정과 현저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b. 군사력 군대의 주축은 중장기병으로서 총병력의 약 반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보병의 지원 없이 독립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 그 지휘관은 역시 귀족 출신이었다. 그 밖에 군역의 대가로 소자영농민이 국유지를 보유하는 둔전병제도를 채택하였다. 해상에서도 많은 위협을 받고있던 제국은 강력한 함대를 육성했는데, 이 함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 라고 하는 일종의 화염방사기에 유사한 특수한 비밀병기를 갖추었다. ㄱ. 군관구제(Thema) -전국을 몇 개의 군관구로 나누어 그 사령관에게 행정권과 군사권을 부여하고, 농민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급여하여 병역 의무를 맡게 하는 제도 * 군단의 사령관이 주둔지의 민정도 함께 다스리게 된 데서 비롯(군정+민정) * 전국에 31개 군관구 설치-> 이후 군관구는 지방행정 단위가 됨. ㄴ. 둔전병제 -현지의 농민을 징집하여 토지를 나누어주고 복무케 하는 제도,10세기 이후 지방 유력자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봉건제도 발생 → 자영농 몰락 * 군관구 장관은 부하병사들에게 군사적 복무에 대한 보상으로 병사 보유지를 지급. 보유지로서 소토지를 받은 병사들이 자영농민층 형성. 이들을 둔전병이라 함. *10C 후반까지 차차 쇠퇴하여 지방 호족의 대토지 소유가 늘어나고 병사보유지가 잠식되어 군관구제는 제구실을 못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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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의 성립

① 327년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제국 비잔티움에 ‘새 로마(Nova Roma)’ 창건하고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Istanbul, 그리스어의 터키 식 표현 to the city 의미)이라 명명→ 로마 제국은 행정상 2개의 수도 갖게 됨. ②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제국 양분 ③ 서로마 제국의 멸망: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476년 멸망 ④ 비잔틴제국(동로마 제국): 1453년까지 지속->중세의 정치와 문화 주도: 고전 계승, 새 로운 문명권 이룸 2. 비잔틴 제국의 흥망성쇠 1) 1기: 비잔틴제국의 성립기 가. 콘스탄티누스 -4세기초~610: 옛로마의 흔적 *콘스탄티누스대제 : 전제 군주제( 군주제 정비를 통해 황제권 강화 ) 콘스탄티노플(정치적 선택) 4c 비잔틴 세계 열림 대경제 도시로 발전 12c : 그리스도교 박해 중지 , 교회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 - 사회적으로 서로마 제국을 멸망하게 한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원심분리적(遠心分離的) 경향 그 밑에서 경작하는 콜로누스는 전자에 대한 예속도(隸屬度)를 깊게 하였으나,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해 일정한 형태를 이룸 - 일반적인 농촌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에서는 도시생활이 번영 서방의 구 영토에는 게르만 부족의 여러 국가가 병립하였으나, 그 왕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를 가부장(家父長)으로 하는 이념적 질서 속에 편입됨. 나.유스티아누스대제 *유스타니아누스 대제 (재위 527∼565) 동로마의 명문가 출신이나 Illyrium 출신으로서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권을 우여곡절 끝에 계승받아 등장하였다. 그는 로마제국 구토를 수복하는 강력한 군사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Belisarius장군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Persia의 세력을 축출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동고트왕국), 북아프리카(반달왕국)의 일부를 회복하게 했다. 또한 외교적 타협을 통해 6세기 중기지 소아시아를 복속하였다. 이런 원정정책의 결과 Theodoric 死後 허약해진 동고트 왕국이 멸망했다. -로마법 대전 편찬, 성소피아 사원 건립 2) 2기: 비잔틴제국의 전성기 가: 헤라클리우스 대외전쟁 - 헤라클리우스(재위 610∼641)는 7년간에 걸친 페르시아 원정, 승리 이슬람에 의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르메니아를 빼앗김 674∼678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이 아랍 함대에 포위되었으나 격퇴함-이시기(7C)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신하여 공용어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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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코스타리카의 개황

코스타리카는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북쪽에 니카라과와 남쪽에 파나마의 사이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리카는 부유하며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지켜가고 있다. 모든 라틴 아메리카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있는 나라이다. 군대가 없다. 그래서 그 나라의 부는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다. 많은 연구자들은 코스타리카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 잘되는 이유는 라틴 아메리카에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할 때 독신남성보다 가족이 정착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30만 인구 중 대다수가 수도인 산호세 근처의 서늘한 고지대에 살고 있다. 여기 작은 농장들에서 농부들은 커피, 사탕수수와 식용작물들을 재배하고 쇠고기를 얻기 위해 소를 기른다. 저지대에서는 바나나가 중요한 작물이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많은 수가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부가 코스타리카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중앙 아메리카에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더 나아가 경제발전과 환경보호는 코스타리카 우림의 많은 산물들에서 나오는 이익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는 반대로 코스타리카 사람들 대부분이 읽고 쓸 수 있다. 산호세에는 빈민촌이 없다. 현대 사회와 경제 발전의 모델인 코스타리카는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해 문제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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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즈의 역사

이 지역은 마야왕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의 현대적인 역사는 1638년-40년 사이에 영국이 벨리즈의 삼림자원을 얻기 위해 정착한 것에서 시작한다. 18세기 말에는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마호가니 나무를 얻기 위해 이곳 벨리즈로 보내어 졌고, 이곳의 영토를 장악하기 위한 스페인 군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정착민들은 남게 되었고, 1862년에는 영국령으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벨리즈는 1864년에 내부적인 자치정부를 달성하였고, 1965년의 선거에서 국민연합당의 당수인 조지 프린스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때 양원제가 소개되었고, 국민연합당은 그이후로 연합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1984년까지의 모든 선거에서 연속적으로 압승을 하였다. 새로운 정부는 벨리즈의 주요 정책의 기강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외자유치와 캐라비안 공동시장에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이웃 국가인 과테말라와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던 외교 문제도 마무리 지었다. 과테말라와 벨리즈는 1859년에 각국의 영토 문제에 관해서 계약을 체결했으나 과테말라는 지속적으로 벨리즈에 대한 군주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1년에 취임한 과테말라의 대통령인 호르헤 세라노는 벨리즈의 해안을 사용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벨리즈의 군주권을 승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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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개관

남아메리카의 북서쪽 끝부분에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의 남쪽 끝부분 연장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는 파나마 시티이며 긴 “S”자 모양의 나라이다. 북쪽 지역은 카리브 해 쪽으로 1,160km의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콜롬비아에 접해 있다. 남쪽 태평양 쪽으로는 1,690km의 험준한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 접해 있다. 면적은 74,979㎢ (남한면적의 3/4)이고 인구는 3,116,000(2003년 추계인구)이다. 산악지대를 제외한 전국토가 열대에 속하고 고온다습하여 연평균기온은 28~33℃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3,300mm에 달한다. 우기는 4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건기는 1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이며 우기에는 거의 매일 한 차례 비가 오고, 건기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특히 카리브 해 연안지방에서는 일 년 내내 호우가 잦고, 열대성 질병이 많기 때문에 주민의 대다수는 태평양 쪽에 거주한다. 전국 어느 지역이나 농업 개발이 가능한 토질과 기후를 나타낸다. 인종은 혼혈인 메스티소 및 물라토가 60%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흑인(13%), 백인(11%), 인디안(10%), 중국계(5%), 기타(1%)로 구성되어있다. 언어는 스페인의 지배로 인해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의 인구(93%)가 카톨릭을 믿는다. 전체를 4등분하여 왼쪽 아래는 청색, 오른쪽 위는 적색, 나머지 대각선으로는 백색의 삼색으로 구성되어 있고 백색 안에는 각각 푸른 별, 붉은 별이 그려져 있다. 청색과 적색은 각각 파나마의 전통적 2대정당인 보수당과 자유당을 나타내고, 백색은 평화와 조화를 상징하며 푸른 별은 청렴결백과 공화국의 성실한 지도원칙을, 붉은 별은 정치의 권위와 국가발전의 정신을 나타낸다. 청, 적, 백의 삼색은 파나마의 독립을 도운 미국의 성조기에서 유래한다. 파나마의 국기는 1903년 11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인 “마누엘 아마돌”이 디자인한 것으로 1904년 잠정적으로 제정되었다가 1925년 정식으로 파나마 공화국의 국기로서 법령 제 48호에 의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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