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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의 필요성은 일찍이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제기되어 있었다. 1096년 8월 15일 승천기념일에 출발한 제1차 십자군 원정단은 우르반 2세가 지명한 푸이의 주교인 아드헤마르가 총사령관으로서 이끌었다. 제2차 십자군운동은 제1차 십자군들의 외곽 거점이었던 에뎃사가 터키족에게 재탈환 당하자, 십자군을 지원하자는 운동이 클레르보의 버나드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제2차 십자군 200,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곳곳에서 패배를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재탈환 당하였다.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2세 아우구스투스가 제3차 십자군을 동원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출군을 명령하였다. 제5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왕이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서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관할하고 동시에 성지로 잇는 도로들을 양도받음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끌었으나 대실패에 그쳤으며, 제 8차 십자군도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7차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튜니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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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절대주의

① 융성 * 칼 5세의 퇴위 동생 페르디난드 1세 - 제위를 물려줌 아들 펠리페 2세 - 에스파냐의 왕위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등의 영토 영국의 가톨릭 여왕 메리와 결혼을 성사 ∴영방군주들의 저항이 심한 독일제국을 버리고, 유럽의 새로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에 영국을 결합시킴으로서 새로운 대 제국으로 나아가길 원하였다. * 펠리페 2세 - 지중해의 패권을 확보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에스파냐의 우월은 절정 ② 몰락 * 신대륙과의 무역 → 막대한 양의 귀금속 유입 → 귀금속은 과도하게 비대해하고 비능률적인 관료제의 유지와 귀족과 궁정의 사치,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비용으로 지출 * 토지 - 귀족과 교회에 집중 → 농민 - 세금․공납으로 빈곤 * 이동목양자조합(=마스타 Mesta)의 특권과 횡포 - 양떼의 이동 → 농업에 타격 * 종교정책 - 이슬람계 농업엘리트 추방 * 모직물 공업 쇠퇴 - 보호육성책 부재, 기술의 후진성 * 상공부르조아지 - 토지를 구입하고 귀족의 지위를 사들여 비생산적인 계층으로 전신하기를 원함 ∴ 국내생산품만으로는 필요한 외국상품을 조달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차액을 화폐, 즉 은으로 충당, 신대륙의 귀금속은 곧바로 외국으로 흘러나갔다. *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강요 - 광대한 이질적인 영토를 통합하기 위하여 실시. 신교도인 영국여왕 엘리자베스를 응징하기 위하여 파견한 무적함대 파견 → 무참하게 패하고, 제국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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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르네상스

영국 왕실은 투더 왕조에 이르러 전제군주제로 발전하였다. 대귀족계급은 장미전쟁 종반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지만, 젠트리와 소지주 자유농민 그리고 도시의 시민계급 등은 무엇보다도 평화와 질서를 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는 신앙상의 대립으로 인한 내전, 국가재정, 외교적 상황등의 위험을 부분적으로 제거하여 광범위한 국민계층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리울 만큼 영국의 정치 사회와 문화전반, 특히 연극예술에 있어서 커다란 반향과 발전이 있었다. 사실상 영국의 르네상스는 1485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 재임중에 시작되어 청교도들이 집권하여 찰스 1세를 폐위한 1649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이 165년 동안 영국의 문화는 일대 격변기를 겪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국내의 잡다한 정치적 사건들의 해결과 함께 영국사회의 오랜 불안 요소였던 카톨릭 세력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588년에 있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는 스페인의 카톨릭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적함대 격파로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어 미국을 비롯한 신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엄청난 이익까지 챙기게 된다. 16세기 후반에 꾸준히 발전을 거듭한 연극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폭발적인 연극예술 활동의 초석이 되었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 때, 여흥을 목적으로 쓰여져 전문 배우들에 의해 무대화된 막간극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상연되었고 한편, 1500년경 초반부터 1580년까지 영국 교극이 점차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교극은 대학 출신들이 직접 희곡을 써서 교정에서 상연되었는데 주로 고대 그리스극과 로마극, 그리고 중세극의 극작술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복수심에 사로잡힌 등장인물들, 무대 위에서의 잔혹장면 사용, 그리고 유령 따위의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등장 등 세네카식의 극작술과 플로투스와 테렌스식 희극 기법과 극작술이 발견되며 중세극에서 시작된 삽화적 구조의 전통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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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르네상스

영국 왕실은 투더 왕조에 이르러 전제군주제로 발전하였다. 대귀족계급은 장미전쟁 종반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지만, 젠트리와 소지주 자유농민 그리고 도시의 시민계급 등은 무엇보다도 평화와 질서를 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는 신앙상의 대립으로 인한 내전, 국가재정, 외교적 상황등의 위험을 부분적으로 제거하여 광범위한 국민계층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리울 만큼 영국의 정치 사회와 문화전반, 특히 연극예술에 있어서 커다란 반향과 발전이 있었다. 사실상 영국의 르네상스는 1485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 재임중에 시작되어 청교도들이 집권하여 찰스 1세를 폐위한 1649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이 165년 동안 영국의 문화는 일대 격변기를 겪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국내의 잡다한 정치적 사건들의 해결과 함께 영국사회의 오랜 불안 요소였던 카톨릭 세력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588년에 있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는 스페인의 카톨릭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적함대 격파로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어 미국을 비롯한 신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엄청난 이익까지 챙기게 된다. 16세기 후반에 꾸준히 발전을 거듭한 연극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폭발적인 연극예술 활동의 초석이 되었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 때, 여흥을 목적으로 쓰여져 전문 배우들에 의해 무대화된 막간극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상연되었고 한편, 1500년경 초반부터 1580년까지 영국 교극이 점차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교극은 대학 출신들이 직접 희곡을 써서 교정에서 상연되었는데 주로 고대 그리스극과 로마극, 그리고 중세극의 극작술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복수심에 사로잡힌 등장인물들, 무대 위에서의 잔혹장면 사용, 그리고 유령 따위의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등장 등 세네카식의 극작술과 플로투스와 테렌스식 희극 기법과 극작술이 발견되며 중세극에서 시작된 삽화적 구조의 전통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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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여왕

종교정책에서 전 여왕 메리 1세의 가톨릭적 반동에 의해서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여왕은 수장령과 통일령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 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전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간의 치세 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 횟수는 불과 10회였다.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 외에도 종교법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월리엄 세실, 프랜시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니콜라스 베이컨, 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폐의 개주를 단행하고,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다. 또 도제조례에 의하여 노동시간·임금 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에 의하여 인클로저 운동과 수도원 해산으로 인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다. 유리, 제당, 제분, 금속, 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 이의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하였다. 특히 역점을 둔 공업, 이를테면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게 하였으며, 모험 상인조합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한 회사조직에 의한 많은 무역 단체에게 특허장을 교부하여 조직함으로써 무역의 확대와 해외 진출을 도모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월터 롤리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페 2세의 구혼을 거절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으며,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드레이크와 호킨스에게 명령하여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 선박의 해상 지배를 위협하였다. 펠리페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가톨릭파의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당해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에스파냐의 해상지배는 무적함대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학자·문인이 속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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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부름

15세기가 끝나감에 따라 교회가 무언가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음이 명백해졌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갈망하였다. 교황청의 몰락과 부정 부패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11쪽) 교회의 개혁이 필요했던 것은 단지 도덕적 윤리적 부분만은 아니었다. 보다 심각하게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였던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새로운 철학적 사조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13쪽)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중들의 불만이 가세되었다. 일반 대중들의 경제적 상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특히 농노들에 대한 지주들의 착취는 더욱더 심해지기만 하였다. 한편 전통적 봉건제도는 그 종말을 맞고 있었다. 처음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에서 강력한 구주들이 출현하여 귀족들로 하여금 전체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국가들의 군주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봉건 영주이기도 하였던 수많은 고위 성직자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억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5쪽) 또 다른 역사적 사건들 역시 서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수평선을 넘어 새로운 세계들이 발견되고 있었다. 옛 세계는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16쪽) 이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통해 수많은 경건한 기독교 신자들은 심각하게 자기의 신앙과 신학을 재검토하게 되었으며, 결국 자기 자신들도 예견하지 못하였던 결론과 입장을 잉태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심각하고 경건하였던 또 다른 신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야기된 의견 충돌과 투쟁이 현재 우리가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 부르는 사건을 이루는 것이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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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배경과 전개 과정

15세기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면 16세기에는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안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타락하고 부패한 중세문화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반 중세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문학을 통해 억눌렀던 인간의 성정을 회복하려는 문예학상의 개혁운동이었다면, 종교개혁은 타락한 구교(가톨릭)을 비판하고 기독교 본래의 순수한 사명을 회복하고자 했던 종교학상의 개혁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반 중세를 지향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지만 그것은 실제로 소수의 지식인들, 즉 특정의 몇 몇 문인과 예술인들에게 의해 시작된 운동인데 비해 종교개혁은 중세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민중과 대중의 자기 각성 운동이요 자각 운동이었다. 이러한 종교개혁 운동의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루터였다. 당시 교황 레오(Leo) 10세는 성 페트로 성당을 개축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만들어, 신도들에게 강매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였던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강매에 격분하여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이 항의문에서 면죄부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인간은 오직 성서와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혁신적인 주장, 즉 성서주의, 또는 복음주의를 내세웠다. 루터에 의해 발표된 항의문은 유럽 여러 나라에 엉청나게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국왕의 악정과 폭정에 불만을 품었던 시민들, 봉건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 신음했던 당시의 농민들에게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자기의 종교개혁 운동의 기초를 다지고 그 원칙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1520년에 3대 논문을 발표하였다. 우선 그는 “독인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국왕이 로마 교회로부터 부와 권력을 빼앗아야 하며, 자국의 영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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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십자가 운동의 여파로서, 상업이 부활되었고 화폐가 다시 교환 수단의 자리에 복귀하자 교회의 재원은 현물 세입에서 금전세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국왕이 로마로 자국의 황금이 유출되지 못하도록 금했던 것이다. 교황청은 파산하게 되었고 그 결과 1305년부터 1378년까지 70여년 동안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남단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게 됐다. 소위 이 ‘교황청의 바빌론 포로시대’동안 교황청은 극도로 타락하게 되어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됐다. 로마의 교회 재산이 이태리 귀족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아비뇽 교황청은 재원의 결핍을 겪게 됐다. 특히 로마의 실지를 되찾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는데 용병 유지를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많은 재원을 필요로 했다. 아비뇽 교황청이 당면한 재정 문제를 해결한 이가 바로 ‘돈 만드는 천재’로 불린 교황 요한 22세(1316~1334)였다. 교황 요한 22세는 기존의 징세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새로운 징세 방법을 고안해 냈다. 프랑스, 영국, 독일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적용한 징세방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임직세 - 새로 임명된 감독이 첫 해의 수입 전부를 교황에게 바치는 세 특수 임직세 - 감독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다른 곳의 감독들을 공석에 임명하고 그들의 첫해 수입을 모두 받아들이는 세 공석 임명 보류세 - 감독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교황이 감독 임명을 보류하고 새 감독이 받아야 할 수입을 교황이 대신 받는 세 대기세 - 공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연로한 감독이 사망할 경우 등) 감독직의 후보자들에게 임명을 약속하고 그들로부터 미리 받아들인 세 서약 변경세 - 성직자가 행한 서약에 해약을 허락하는 대가로 받아들인 세 성직 매매세 - 성직을 매매하는 대가로 받아들인 세 면죄부세 - 면죄부세는 성자들이 쌓은 공로는 자신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죄하고 구원하는 혜택까지 줄 수 있다는 교리에 근거했다. 즉 교황이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 성자들의 공로의 혜택을 나누어 주면 면죄부를 사는 사람의 죄 값으로 치러야 할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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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기운

·교회 권위의 추락 중세에 로마교회의 세력이 커지면서부터 교황과 성직자들은 크리스트교 본래의 정신을 잊고 사치과 돈벌이에 눈이 어두웠다. 그들은 신앙보다는 형식과 의식에 처우쳐 교회의 타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민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오던 크리스트교는 십자군의 원정실패로 더욱 위신이 떨어졌고, 르네상스 운동으로 사람들의 자각이 높아짐에 따라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비난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를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크리스트 교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운동을 종교 개혁이라 부른다. ·위클리프 그 첫 번째 움직임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4세기에 영국 옥스퍼스 대학 신학 교수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을 모으는 것을 반대하고, 또 교회의 규칙보다도 성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스스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휘스 전쟁 이 무렵 로마 교회에서는 면죄부를 만들어 팔면서 이것을 사면 죄를 용서받는다 하여 신도들로부터 돈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이에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의 교수 휘스는 15세기초, 이제도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교황이나 교회보다도 성서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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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Reformation)의 시작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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