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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양귀비는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서시(西施)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나,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世人)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되었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립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진국부인에 봉해졌다. 또한, 친척 오빠인 국충(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通婚)하였다.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迎合)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進上)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안록산은 이란계와 돌궐계의 혼혈아라고 추측되어지는 인물로, 오랑캐 출신이었다. 안록산은 처음에는 이림보에 의해 등용되었으나 차츰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안록산은 체중이 약 2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대단한 뚱보였으며 그의 배는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현종이 그의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엇이 들었기에 그리도 뚱뚱하냐?"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들어 있습니다." 안록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양귀비는 안록산의 이러한 성격에 매료되어 그를 가까이 대하였다. 그리고 이 둘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건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때 명문귀족 출신인 재상 이림보는 정치에 싫증이 난 현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 귀족 세력의 반대를 견제하기 위해 이민족이나 서민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에 안록산은 이림보의 지원 속에 평로(동북지방), 하동(태원지방), 범양(북경지방) 의 세 지방의 절도사를 겸하게 되는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권신 이림보가 죽고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에 오르자 안록산의 출세 가도에는 먹구름이 끼게 되었다. 안록산은 이를 그대로 묵과해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안록산은 마침내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의 기치를 올리게 된 것이다. 현종은 양귀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안록산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현종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을 찾았으나 이미 전투를 할 만한 군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한편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안록산군은 진격을 계속해 파죽지세로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에 안록산군을 피해 황제와 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양귀비는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들에 의해 죽음을 강요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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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광해군 1575(선조8)~1641(인조19) 조선 제15대왕. 재위 1608~1623.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광해군의 비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에세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진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광패(狂悖)하다고 하여 보류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의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國事)권섭(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 함경도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하 군무사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 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종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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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슈트아르트

스코트랜드의 여왕 마리아 슈트아르트는 불륜의 사랑으로 16세기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잉글랜드로 망명했지만 숙명의 라이벌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당하는 것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비극의 여인이다. 결국 처형으로 끝난 그녀의 인생에는 세 남자가 있다. 결혼 두번에 불륜의 사랑도 한번... 그녀는 여섯살에 훗날에 프랑스 왕이 된 프랑수아 2세와 결혼을 했다. 메리가 17살때 남편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코트랜드로 돌아갔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인기가 많았다. 그녀는 영국 귀족 더린경을 선택해 결혼했다. 선택한 두번째 결혼이지만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여자와 술을 좋아해서 바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운 마음을 채울 수 없었던 그녀는 유부남 귀족인 보스웰과 만나 임신을 한다. 마리아는 보스웰과 짜고 남편 더린경이 요양하고 있는 별장에 폭탄을 설치해 집과 함께 폭파해버린다. 그리고 보스웰은 여왕을 납치해 결혼한다. 당시 스코트랜드의 법에는 '남자가 여자를 강제로 욕보인 경우, 그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사건에 국민과 귀족들은 반발을 했다. 마리아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보스웰과의 사랑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에게 차가운 눈초리만 보냈다. 마리아는 19년간 죄수생활을 하고 결국 처형된다.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불과 25년의 세월이었다. 구교와 신교의 종교분쟁과 구교도인 마리아는 비극적인 삶은 관련이 있다. 신교 옹호자인 엘리자베스의 사후 왕위 계승권자는 구교도인 마리아였다. 신교 귀족들은 또 종교분쟁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엘리자베스가 죽기 전에 마리아를 처리해야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15887년 사형을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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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세종의 휘(諱)는 도요, 자(字)는 원정(元正)으로 1497년(태조 6)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전주이다. 아버지 이방원(1367-1422)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향처(鄕妻)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다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유덕(遺德)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1383년(우왕 9)에 문과(製述業)에 급제하여 1392년(고려 공양왕 4) 3월에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 해 7월에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등 역성혁명(易姓革命)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 해 8월에는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으나 정도전 등의 배척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끼지도 못하고 세자 자리도 이복 막내 동생인 방석(芳碩)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1398년(태조 7)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둘째 형인 방과(芳果)를 2대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1401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넷째 형 방간(芳幹)을 귀양 보내고 정종(恭靖王)의 선위(禪位)를 받아 3대 왕이 되었다.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그의 사병(私兵)을 방과에게 보냈다는 비난을 받았고, 밖에 있던 자신의 아들을 불러들여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방원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성공하여 개국공신, 정사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그의 동복형제는 방우(芳雨)·방과(芳果)·방의(芳毅)·방간(芳幹)·방원(芳遠)·방연(芳衍) 등 여섯이 있었으며, 이성계가 출세한 뒤에 얻은 경처(京妻)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가 낳은 방번(芳蕃)·방석(芳碩) 등의 두 이복형제가 있었다. 동복누이로는 경신공주(慶愼公主)와 경선공주(慶善公主)가 있었으며, 이복누이로는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있었다. 신의왕후의 본관은 안변(安邊)으로 출신이 한미한 증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이다. 이에 비하여 신덕왕후는 고려 말의 권문세가로서 많은 재상을 배출한 곡싼(谷山) 강씨 가문의 판도사판사(判圖司判事) 강윤성(康允成)의 딸로서 시골 사람인 이성계가 중앙 관계에 진출하여 역성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때문에 태조가 왕조교체에 공로가 많은 방원을 세자로 세우자는 조신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신덕왕후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남은·심효생(방석의 장인) 등으로 하여금 세자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閔)씨로 본관은 여주이다. 세종의 외삼촌은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의 4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방원을 도와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들이었으나 외척세력을 근절시키려는 태종의 의지 때문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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