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내 검색

세계사교육(세계사교과교육)의 성격

세계사 과목은 학생으로 하여금 인류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의 우리와 우리가 사는 국제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그 기반 위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여 이에 대처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특정한 지역 편중을 탈피하고 각 지역과 각 민족의 역사를 균형 있게 다루어 ‘전체로서의 세계사’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국제 협력과 범세계적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다양한 민족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계사는 세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명과 인류 사회의 광범위한 발전 과정을 다루게 되므로, ‘세계’라는 개념의 전제 하에 과목 내용의 구조화가 특별히 요청된다. 또 세계사의 보편성에 근거할 때에 비로소 한국사의 객관적인 성찰과 평가가 가능해지므로, 세계사는 국사와의 연계학습을 필요로 한다. 특히, 고등학교의 세계사 교육은 사회와 세계의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 인식이 강조된 중학교와는 달리, 세계사의 발전에 대한 종합적체계적 이해에 주안점이 두어져 있으므로 세계사의 학문적 구조 파악을 위한 계통학습이 강조된다.

역사 > 세계사

세포이항쟁 개관

세포이항쟁은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병사들(세포이들)이 영국의 인도지배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1857~58)이다. 널리 확대되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반란은 처음 미루트에서 시작하여 델리·아그라·칸포르·러크나우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반란을 단순히 세포이들이 일으킨 반란으로만 여기면, 1818년 인도에서 영국의 주도권이 확립된 후 시행된 급속한 서구화의 진행속도를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서양 사상의 도입으로 힌두 사회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힌두교도들의 신앙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인도주의 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상부구조만으로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개혁을 가져왔다. 댈하우지 경은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힌두 사회 과부들의 재가에 장애가 되는 법률조항들을 삭제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들은 그들의 힌두인 형제들과 공동으로 가족 영지의 재산권을 소유할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카스트 제도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더욱이 서구식 교육의 도입은 정통 힌두교와 이슬람에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에 덧붙여 귀족 브라만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브라만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 이후 자신들의 수입원을 빼앗기거나 유리한 지위를 상실했다. 어느 곳에서나 전에는 인도 귀족이 하던 일을 영국 관리들이 대신했다. 벵골군은 인도인들을 군사적으로 조직화한 유일한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먼저 반란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엔필드 총을 도입한 것이 반란의 직접적인 구실이 되었다. 세포이들은 이 총에 탄알을 재기 위해서 기름이 발라진 탄약통 끝부분을 물어떼어야 했다. 세포이들이 탄약통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사용된 기름이 돼지와 소의 기름을 혼합한 것이라고 믿었던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던 듯하다. 돼지와 소의 기름을 입에 대는 것은 이슬람교도들에게도 힌두교도들에게도 엄청난 모욕이었다. 1857년 4월말 미루트에 주둔하고 있던 세포이 병사들은 탄약통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처벌로서 이들에게 장기 구금형이 내려져 이들은 족쇄가 채워져 감옥에 갇혔다. 이같은 처벌에 인도인 동료들은 분노했다.

역사 > 역사일반

오스만제국 개관

오스만제국(오스만 터키어 :Devlet-i Aliye-yi Osmaniyye)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現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 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그 영토는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여 20세기 초반에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후세의 역사 전승에 대해 시조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지는 1299년을 건국 연도로 하는 것이 통례이며, 술탄제가 폐지되어 메메드 6세가 폐위된 1922년이 해체 연도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오스만 왕조 초기에 대해서는 동시대의 사료가 부족하고, 사실과 전설이 혼연하고 있으므로 정확한 건국 연도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다.

역사 > 역사일반

원효의 철학과 사상

원효는 뭇 이쟁(異諍)을 화회시켜 모든 강물들이 바다에 가서 한 맛(一味)이 되듯이 그의 사상을 ‘기신론’의 그조와 같이 중생의 마음(衆生心)인 일심으로 회통 시키고 있다. 부정과 긍정, 초월과 내재, 있음과 없음, 세움과 깨뜨림, 불화와 조화 등 모든 상대적 이쟁들을 원흉과 조화의 바다로 끌어 들였다. 그가 세운 생각의 논리적 근거는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 그리고 ‘금강삼매경론’과 ‘십문화쟁론’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의 100부 240권의 저작들이 한결같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감싸고 있는 일심, 즉 중생심(衆生心) 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갈무리하고 있는 일심을 그는 이치가 아닌 지극한 이치이며, 그렇지 아니한 큰 그러함이라고 갈파했다. 원효의 저서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그 내용이 정연한 조직과 공통된 주지(主旨)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만법은 보는 바에 따라서 一도 되고 二도 되나 결국은 일에 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효는 일보진하여 일의 체(體)를 설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물자체(物自體)는 우리의 주관과 독립된 절대적 실재라고 하나, 원효는 이것을 교묘하게 논하여 본체란 것은 광탕(曠蕩)하여 절대인 것으로 공평무사하여 진속염정(眞俗染諍)이 모두 一에 화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본체에서 化生한 삼라만상의 현상계는 하나라도 제거할 수 없고 우열도 없으니 차별 그대로가 불법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원리로서 통불교적 신종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원효의 이상인 듯하다. 화쟁론이 그의 골자라 하나 각 저서를 통해 보면 일관한 주지가 있다. 즉 ‘법화경종요’는 일불승으로서, 설하고 ‘대혜도경종요’는 실상무상을 설하고, ‘대승육정참회법’은 일체무이한 것을 설하고, ‘열반경종요’는 열반의 체용을 설하여 망언심지하면 불과일념이라 설하고, ‘미륵상생경종요’는 법성일여를 설하고, ‘무량수경종요’는 심성체평등을 설하고, ‘금강삼매경론’은 일체중생동일본각을 설하고, ‘기신론소’는 일심지원을 설하고, ‘능가경요간’은 개의성전 유하불실을 설하고, ‘아미타경소’는 본래일심을 설하고, ‘유심안락도’는 심성융통을 설하고, ‘화엄경소’는 여래신법계주변을 설하고, ‘해심밀경소’는 동일미를 설하고, ‘본업경소’는 일도일과를 설하고, ‘기신론별기’는 진속평등을 설한다. 이와 같은 용어는 그 經과 論의 성질에 의하여 다르나 전 불교를 화회귀일(和會歸一) 하려는 주지는 주옥을 낀 것과 같이 명료하다.

역사 > 역사일반

법사상가의 한비자의 생애

법가 사상을 종합 정리한 사람은 한비자입니다. 한비자의 출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기원전 280년 경으로 봅니다. 의 '노장신한 열전'에 의하면, "그는 한나라의 높은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고, 형명법술의 학을 좋아하였으며, 언변은 능하지 못하였으나 저술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항명법술의 학'은 법가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기에서는 한비자가 이사와 함께 순자에게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비자가 순자에게 직접 배웠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곽밀약이나 가이쯔까 같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순자의 사상이 한비자에게 수용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순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춘추 전국 시대의 법가 전통과 도가, 묵가, 유가의 사상이 한비자의 체계에 흡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국 시대 말기 이후 각 학파 사이의 사상적 교류와 융합의 자연스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청년기는 그의 조국 한나라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시기입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5세기 말 경 진나라의 침입을 받은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 강대한 이웃 나라에게 군대를 잃고 영토를 유린당했습니다. 한비자는 위기에 놓인 조국의 정세를 인식하고 한나라 왕에게 여러 차례 국정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소가 채용되지 않자 한비자는 자신의 부국 강병 방안을 10여 만 자의 저술로 남겼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고분'과 '우두'편을 우연히 읽은 진시황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사상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원전 234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은 한비자를 진에 사신으로 보내 위기를 넘기려 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진시황을 설득하여 조국의 위기를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도리어 진시황은 한비자를 자기 편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와 요가의 획책으로 한비자는 감옥에서 사약을 받았습니다.

역사 > 역사일반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부터 시작하여 태종 5년(1405) 10월까지 1년간의 공사 끝에 이궁으로 창건되었다. 궁명은 창덕이며 정전은 인정전이다.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를 짓고, 태종 12년(1412)에 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으며, 세조가 즉위하면서 인정전을 다시 짓고 궁내 각 전각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조계청은 선정전, 후동별실은 소덕전, 후서별실은 보경당, 정전은 양의전, 침실은 여일전, 서침실은 정월전, 루는 징광루라 하였다. 세조 9년(1463) 인접한 민가를 헐어내고 후원을 확장하였다. 창덕궁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부 소실되었다. 왕궁의 복구공사는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거의 마무리했다. 조선초기에는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왕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나 임난 이후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이 정궁 노릇을 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그 복구공사는 인조 25년(1647)에야 완료되었다. 효종 7년(1656)에는 만수전, 춘휘당, 천경전을 건립하였는데, 만수전과 천경전이 숙종 13년(1687)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숙종 21년(1694) 춘휘당을 선원전이라 개칭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숙종 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을 조성하고 정조 원년(1776) 9월 후원에 규장각(주합루)를 건립하였다. 정조 6년(1782)에는 인정전 뜰에 품위석을 설치하였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인정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에 즉시 복구한 바가 있고, 순조 24년(1824) 8월에도 불이 나서 경복전이 모두 불탔다.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후원을 일반 백성에게 관람시키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다. 1920년 이들 침전을 복구하였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복구하고 강녕전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복구하는 등 경복궁의 많은 침전을 헐어 창덕궁 부속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역사 > 문화유산

창덕궁의 연혁

창덕궁은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 하면서 창건한 궁으로 태종 12년에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먼저 창건된 경복궁의 동쪽에 조성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정궁(正宮)이 아닌 이궁(離宮)의 성격으로 건립되며 경복궁에서의 상대적인 위치로 `동관대궐` 또는 `동궐(東闕)`이라 불린다. 조선이 한양으로의 천도 계획에 따라 정궁으로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평탄한 대지에 궁궐조영에서의 기본규범을 준수함으로써 왕권 확립을 위한 권위와 정통성을 갖춘 모습으로 건설된 것에 비해 창덕궁은 이궁이라는 성격상의 차이도 있고, 삼국시대 이래로 궁실의 조영에서 적용되는 지형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여 시설하는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한국적인 궁궐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궁 이라는 점이 큰 특징이며, 동시에 경복궁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11년 광해군에 의해 다시 지어진 이 궁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아름다우며 인정전, 대조전, 낙선재 등 많은 문화재가 곳곳에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일곽이 1920년대 이후로 원래의 모습과는 크게 변형되어 건물 주변이 답답하게 조성되었다는 점과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부속 건물들이 대부분 철거되고 주요 전각들의 일부만이 남아있어 궁궐의 진면목을 살펴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역사 > 문화유산

임오군란 원인

1876년 12월 박규수 사후에 개화파는 점차 의견과 노선의 대립이 생겨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두 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온건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점진적으로 개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온건노선을 취하였고, 급진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적극적이고도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되어야 한다는 급진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執權勢力이었던 전자는 중국의 자강운동(양무운동) 같은 방식을 따르고 하였고, 후자는 주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따르려 하였다. 이에 급진개화파는 자파를 개화당 혹은 독립당으로 부르고 온건개화파를 사대당 혹은 수구당이라 불러 각기 차별성을 부여하였다. 온건개화파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이조연 등으로 개항 이후 나라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던 인물들이었다. 급진개화파의 인물들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동지규합에 힘쓴 결과 유혁로, 변로, 이동인 등 양반, 중인, 군인, 상민, 승려 등 다양한 신분 출신의 인물들을 개화당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또한 정계의 핵심에 통리기무아문 당상 이재긍과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 그리고 이조참판 홍영식 등이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開化政策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立이 크게 침해되고 있었다. 반면 청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에서 민씨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궁성을 장악하여 크고 작은 정사를 일일이 간섭하였다. 이에 따라 자주근대화를 표방하고 개화당 요인들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은 집권파 인사들에게는 위험시될 수밖에 없었고, 개화당은 곧 경계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집권 척촉 세력과 개화당 사이의 이러한 불신과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어 갔다. 특히 보방사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귀국하는 1884년 5월 이후로 개화당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개화당 인사였던 민영익이 귀국 후 집권파에 붙고, 8월에는 친군영제가 실시되면서 營使가 되었으므로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사 > 한국사

자금(紫禁)성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역사 > 문화유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