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내 검색

유길준 兪吉濬

유길준은 개화사상가, 정치가이며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이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진사를 지낸 유진수(兪鎭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인 이경직(李敬稙)등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870년(고종7년)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김윤식(金允植) 등 개화청년들과 실학사상을 배우는 한편 위원(魏源)의 와 같은 서적을 통하여 해외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가 경영하는 게이오 의숙에서 유정수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하여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閔泳翊)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 1월에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에 임명되어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발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척족세력의 견제로 신문발간사업이 여의치 않게 되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7월 보빙사(報聘使 : 조선의 특별 사절단, 친선사절단의 하나)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도미하여, 일본유학 때에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처음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일본에 소개한 메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 박물관장인 모스(Morse)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 12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을 집필, 1895년에 출판하였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세종대왕

세종대왕(1397 ~ 1450년)은 조선 제4대 왕으로 재위는 1418 ~ 1450년이다.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으로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원경황후 민씨의 소실이며 훗날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를 비로 맞는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에 봉군되고,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이외에도 음악이나 농사 등 소소한 분야에까지도 많은 관심을 가진 왕이었으며 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인재등용에 힘쓴 왕이다. 이러하여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사도세자는 누구인가?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삼종의 혈맥(효종, 현종, 숙종)’을 잇는 원자가 축복 속에서 탄생했다. 생후 14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된 이 아이가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22대 임금이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17년 후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죽을 줄은 더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손 귀한 왕의 핏줄인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리고 비행을 했다는 이유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며, ‘패자의 기록’은 비참하리만큼 왜곡됐거나 남아 있지 않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붕당정치와 관련이 깊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성장해감에 따라 자신들의 세력에 포섭하려 하였다. 영조도 노론이었고,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도 남편을 따라 노론을 택했으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도 노론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 쪽으로 기울며 고립되기 시작했다. 효종을 닮아 북벌을 꿈꾸고 문과 무를 겸비한 사도세자와 현상유지가 최선인 노론과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인 것이다.

인물 > 왕족

민족시인 이육사

이육사(1904 ~ 1944)는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육사라는 ‘호’는 1927년 처음 옥에 갇힌 죄수번호가 264라 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본명은 원록(源綠),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나 다섯 살 때 조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으며 17살 때 영천 안용낙의 딸 일양과 결혼,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6.10만세사건 후 1926년 북경에 가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된다. 1932년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그 후 시인활동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시인 신석초와 친교하며 『신조선』편집에 참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게 되었다. 1937년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의 시작발표는 1941년까지 계속되었다. 1943년 베이징에서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계획을 세웠고 그 해 귀국하여 피검,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되었다. 1944(40세)년 1월 북경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40년대 윤동주와 더불어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그의 시가 절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초인 의지를 강렬한 남성적 어조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시의 여성 편향적 어조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김구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 17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 때 그의 집안은 매우 어려웠는데, 그 것은 그의 선조 중에 인조반정 공신이었다가 후에 조선이 명의의 연호를 쓰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한 혐의로 처형당한 김자점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집안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그 일부가 해주로 내려와 은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향호들의 압박과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그 후 그는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였으며, 항상 우등하였다고 한다. 1890년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실패하였고, 1892년에도 우리나라 최후의 과거로 임시시행 되었던 경과를 보기 위해 해주로 갔으나 당시의 부패한 현실에 실망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었으며,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12대, 1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서재필의출생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송재이고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1864년 1월 7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부친 서광효와 모친 성주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고 충남 논산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의 칠촌 아저씨 서광하에게 아들이 없어 그곳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의 양모는 한 때 세도가 안동김씨의 집안이었다. 일곱 살 무렵에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판서직에 있던 외삼촌인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세가 되던 1882년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 번째로 합격하여 개화파 우두머리 격인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김옥균, 서광범은 서재필의 친인척 관계로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이들과 지내면서 개화에 관한 지식과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아 갔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육군학교에 유학을 하여 당시 일본의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도입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훈련을 공부하고 1884년 국내의 정치사정과 정부의 재정상의 이유로 귀국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 고종의 승낙을 받고, 조련국의 사관장이 되었으나 임오군란이후 청의 세력과 수구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이명직(李明稙)의 생애 (1890-1973)

이명직은 1890년(고종 27년) 12월 2일 서울 충정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이성태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이성태는 대궐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있었으나 생활은 어려웠다. 그는 구한말 차츰 무너져 내려 앉는 조정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결국은 한국의 사법권을 일본에 위탁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권 및 감옥사무의 처리권을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가 1909년에 체결되자, 관직의 뜻을 버리고 물러났다. 그는 아들 명직에게 정치에 입신하여 출세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명직은 입신양명이라는 목적에는 그의 부친과 뜻이 같았으나 그 방향은 달랐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도승이 되어 평생을 바칠 결실을 하였으나, 종교심성의 발휘는 불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종로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입학하면서부터인데, 성경과목에 흥미와 관심은 있었지만 개종하지는 않는다. 그 후 박감은과 결혼하고, 1909년에 일본 휴학길을 떠났다. “배워야겠다.”는 굳은 신념 아래 무단가출의 형태로 무작정 일본에 건너간 그는 거의 1년 동안은 방황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일이 일어났다. 박용규는 새 종교인 기독교로의 열정적인 추구를 가지게 된 이명직을 설명해주고 있다. '동경으로 건너간 이명직은 배워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일본에 건너왔으나, 어떤 학교를 정해야 하는지 몰랐다. 어느 날 동경를 걷다가 한 모퉁이에서 요란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거리에는 구세군 전도대가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거리 구경을 나온 터라 전도 강연을 다 들었다. 전도 강연을 다 들은 이명직은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받았다. 그 뒤 어느 날 저녁에 동경 Y.M.C.A 총무로 있는 김정식을 만나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는 기독교를 믿기로 하였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안도현

1961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서 아버지 안오성과 어머니 임홍교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대구 아양국민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문예반 '태동기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홍승우·서정윤·박덕규·권태현·하응백·이정하 등의 선후배들을 알게 되었고, '학원문학상' 등 전국의 각종 백일장과 문예 현상공모에서 수십 차례 상을 받았다. 1980년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고, 대구에서 발간되던 통신문학지 《국시》 동인으로 aa박기영·박상봉·장정일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학 시절 최정주·최문수·권강주·정영길·김영춘·백학기·이진영·이요섭·이정하 등 선후배들을 알게 되어 이들과 '원광문학회'를 결성하였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었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989년 8월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리중학교에서 해직당하였다. 이후 1994년 2월까지 전교조 이리익산지회에서 일하면서 김진경·도종환·배창환·조재도·정영상·조성순·조현설 등과 함께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하였다. 1994년 3월에 전라북도 장수 산서고등학교로 복직되어 일하다가 1997년 2월 교사직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85년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하고 김백겸·고형렬·양애경·김경미·고운기 등과 함께 '시힘' 동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에는 이광웅·정양·김용택·이병천·박남준 등과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9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지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6년 제1회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0년 원광문학상, 2002년 제1회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지금은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안도현작가의 작품세계- 안도현 시인이 들려주는 연탄 이야기는 가슴 따뜻하다. ‘스물네 개의 훈훈한 이야기-은 시인 김지하 원재훈,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소설가 신경숙 이순원 방현석 한창훈,영화배우 오지혜,방송인 임백천,화가 황주리,드라마 작가 노희경 등 연탄에 관한 글 24편은 글쓴이의 개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각기 살아온 인생을 풀어놓으며 들려준 연탄 이야기는 명치 끝이 아릴 만큼 슬프기도 하고 배시시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기도 하다.

인물 > 문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