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내 검색

신경숙

생애 1963년 1월 12일 전북 정읍 출생 1979년(17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입학 1982년(20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졸업 1982년(20세)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입학 1984년(22세)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 학사 1985년 중편소설 '겨울우화' 당선 문단 데뷔 1993년 제26회 한국일보 문학상(풍금이 있던 자리)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3 1995년 제40회 현대문학상(깊은 숨을 쉴때마다) 1996년 제11회 만해문학상(외딴방) 1997년 조선일보사 제정 제28회 동인문학상(그는 언제 오는가) 1999년 결혼 2001년 제25회 이상문학상(소설-부석사) 소설 『겨울우화』,문예중앙,1985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사회 여름호,1992 『깊은 슬픔(상.하)』,문학동네,1994 『동전 두개에 관한 생각』(공저),삶과 꿈,1994 『깊은 숨을 쉴때마다』,현대문학,1995 『아름다운 그늘』,문학동네,1995 『외딴방』(장편),문학동네,1995 『감자먹는 사람들』(중편),창작과비평,1996 『그는 언제 오는가』(중편),1997 『기차는 7시에 떠나네』(장편),문학과 사회,1997 『어두워지기전에』(전자책),2000 『부석사』(중편) 『바이올렛』(장편),문학동네,2001.8 소설집 『겨울우화』,1990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1993 「나의 나-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공저),문학동네,1996.6 『오래 전 집을 떠날때』,창작과비평사,1996 『강물이 될때까지』,문학동네,1998 「딸기밭」(중.단편집),문학과지성사,2000 『J 이야기』,마음산책,2002 『종소리』,문학동네,2003

인물 > 문학인

이승휴의 생애

이승휴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인관료로써 우리나라의 최초의 개국에 대한 설화가 실려있는 『제왕운기』를 편찬한 역사가로써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제왕운기』는 역사서 라는 분야 외에도 민족대서사시(民族大敍事詩)로써 국문학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출생 및 생애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 휴휴(休休)라 칭하며 최신무인정권의 시기였던 1224년에서부터 원간섭기인 1300년까지 76년 동안 우리의 민족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고종 39년(1252) 문과에 급제한 후 김준, 임연등의 무인정권이 몰락하는 시기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삼별초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며 원간섭기 시기에 정치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좌절하고 마침내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치게 된다. 즉 그의 일생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간섭 속이라는 복잡 다단한 국제 관계 속에서 민족적 시련을 절실히 느끼며 살다간 일생이라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승휴의 출신 배경을 살펴보면 가리이씨의 시조로써 가리이씨 중 이승휴 이전에는 알려진 인물이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름 없는 가문의 출신 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관인 가리현과 멀리 떨어진 삼척 출신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점이나 이승휴의 종조모가 북원군부인 원씨로써 태복경 임천부의 부인이었다는 사실등을 미루어 보아 이승휴의 아버지는 중앙에서 낮은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토대로 말이암아 당대의 이름있는 유학자인 신서로부터 좌전, 주역 등을 익힐 수 있었고 명문 사학(私學)인 문헌공도(文憲公徒)에 들어가 학업을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요약하면 이승휴는 무인정권기를 발판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회 세력이였고 대략 아버지대에 이르러 벼슬을 시작한 가문의 출신 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휴는 17세가 되던 해(1240) 하과장에서 수석하고 당대 최고의 문인인 최자(崔滋)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였으나 최자와 종조모 원씨가 죽어 중앙에서의 근거가 약해지게 되고 몽골의 침입과 가난 등으로 10여년 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당시의 외침과 정치적 혼란속에서 일반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맛보았다.

인물 > 문학인

한용운의 생애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기 전까지 그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이름은 유천으로 법명이 용운이고 법호가 만해이다. 그는 6세에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고 14세에 천안 전씨와 결혼 하였다. 그가 26세에 맏아들 한보국이 태어났으며 27세에 고향을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와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백담사에서 득도하게 된다. 그가 고향을 떠나는 시기를 19세, 25세로 보는 설도 있다. 29세에는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하산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 갔으나, 일진회 첩자로 오해를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되돌아와 안변 석왕사를 비롯해 여러 곳을 전전한다. 30세에 일본의 마관, 궁도, 경도, 동경, 일광을 주유하며 신문물을 보고 동경 조동종대학에서 아사다 교수의 주선으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수강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에서 처음으로 불교강사에 취임하였으며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 하였다. 33세에 동북 삼성을 주유하면서 독립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일본 첩자로 오해를 받아 총에 맞고 마취 없이 총알을 제가하는 수술을 받는다. 36세에는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였고 조선 불교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40세에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이 되었고 동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등을 비롯하여 시「심」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더욱 문학창작에 열을 다한다. 1919년 그가 41세에 조선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주도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하였다. 경성 명월과 지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 하였다.

인물 > 문학인

채만식의 생애

1925년 《조선문단》지에서 단편소설 「새길로」가 추천됨으로써 백릉 채만식의 작가적 생애는 시작된다. 1925년은 약칭 가 결성된 해이므로 이 무렵부터 한 동안 사회주의 문학운동이 문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 카프에 가담해 있지 않은 문학인이라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방편을 사회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이론화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신예 문학인들의 활동을 카프 쪽에서 포섭해 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카프에 가담하지는 않은 채로 역시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띠고 작품 활동을 한 작가들이 있으니 이들을 동반자 문학인이라 하였다. 채만식을 포함하여 이효석, 유진오, 이무영 등이 작품 활동 초기에 모두 동반자 작가 동반자적 경향이란? 1920년대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나선 카프는 식민지 상황의 극복과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한 정치적 실천의 일환으로 문학 운동을 전개한다. 동반자 문학은 이 같은 운동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문학의 대의에 동조하는 문학을 가리킨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작가는 이효석, 이무영, 박화성, 한인택, 최정희, 이상, 조용만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채만식은 원래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체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농인 채규섭의 다섯째 아들로 태아나 막내로서 자라난 그는 성격이 남달리 까다롭고 결벽이 있으며 귀족적이었다. 1922년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조도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이때에 스포츠를 즐겨 하였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그는 몸이 약한 편이었고 특히 1930년대 말에 이르면서부터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었다. 그는 1930년대 이 땅의 자유주의적 인텔리의 전형이었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신문학에 대한 주변의 흥분된 권고에 의해 일본 유학을 하고 그것도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들이 많았다. 채만식도 대학에 입학하던 다음 해에 동경 대지진이 일어나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역시 정해진 길처럼 신문사, 잡지사의 기자로 전전한다. 그 중에서는 혹 작가 시인도 되고 아무튼 노동력 없는 문화인으로 지내면서 대를 물려온 토지도 다 팔아먹고 말년에 이르러 극심한 경제적 곤궁을 겪으며 죽어간다. 이와 같은 코스가 작가 채만식의 생애에도 그대로 대입되어 있었다. 그는 특히 결벽이 강하여 광범한 교우관계도 없었지만 지극히 좁은 범위 내에서 몇몇 작가들과는 또한 유난히 두터운 정분을 가지고 지냈다. 후배인 최태웅, 동료인 이무영 정도가 깊이 사귄 벗이었는데 그들 벗에게 작가 채만식의 인간성을 잘 나타내 보여주곤 하였다. 작품에 대해서도 채만식만큼 결벽인 예도 없지만 일상생활도 그러했다. 심한 예로는 객으로 왔건만 상에 놓인 수저를 반드시 자기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로 씻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벽, 지나치게 귀족적인 그의 성격이 대부분의 문우들과 섭쓸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어 고독했고 그것이 그의 건강을 해친 원인도 되었었다. 그날의 이야기도 이 눈에 거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왜정에 대한 불평불만, 마뜩치 않은 관리, 출판사, 친구... 조그만 부정에 대해서도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건강을 해친다고 무영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도 그는 그런데 눈을 감고 사느니 차라리 죽겠노라고 했다. 사양 무렵이나 되어서 보리쌀 한 말에 쌀 닷 되를 둘이서 작대기에 꿰들고 10리나 되는 역에까지 나오면서도 채만식은 건강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었다. 역에서 차를 태워 보내고 나니 친구를 영겁의 길로 떠나보낸 것 같은 슬픔에 무영은 주막집에 들러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와서 취중에도 무영은 채만식 그치 일찍 죽겠어!ꡓ이런 소리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구중서, 『역사와 인간』, 작가, 2001, 376~379면.

인물 > 문학인

소월의 생애와 그 문학적 배경

1. 김소월의 출생과 그의 고향 정주 김소월은 본명이 정식으로, 1902년 9월7일 어머니 장경숙의 외가인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에서 아버지 김성도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일 후에 평북 정주군에 본가로 돌아왔다.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는 소월의 시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먼저 정주는 능한산과 서해를 중심으로 하는 배산임수의 명승지로 소월의 낭만적 시 경향의 모태가 된다. 또한 정주는 일찍 개화에 눈을 떠서 기독교가 전파되고 신학문이 수용되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곳이었고, 이광수, 김억, 백석 등 많은 문학인과 안창호, 이승호, 조만식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한 지역 으로 이는 소월의 문학적 면모와 민족주의 확립에 영향을 미친다. 2. 아버지의 사고와 소월의 고독감 그의 아버지 김성도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에 음식 선물을 말 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가 그것을 빼앗으려던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한다. 그의 아버지는 한달 가까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나지만 이후에 정신 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지내게 된다. 이는 소월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명랑하고 총명했던 유년기의 소월은 이러한 이유로 나이를 먹을수록 우울하고 고독해하는 내향적 성격으로 변모해갔다. 소월의 생부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고아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암울한 환경에서 소월의 한의 문학이 배태되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장씨는 시집온 지 4년 만에 소월을 낳고 딸인 인저를 얻었으나, 남편이 정신이상을 일으키자 소월에게온 정성을 쏟고 그에 의지하여 평생을 살아간 불행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문맹이었던 탓으로 소월은 모친과의 대화에서 단절감을 느꼈고, 남편을 대신한 맹목적인 자식사랑에 오히려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소월의 고독감은 그의 선천적인 성격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이와 같은 부친과 모친 사이의 심리적 단절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3. 숙모 계희영과의 만남 소월의 유년기 인격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일은숙모 계희영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계희영은 누구보다도 소월의 성격형성, 특히 문학적 감수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지방토족의 딸로서 부유하게 자랐으며, 또 신학문에도 일찍 눈을 뜬 집안에서 자라 언문을 익혀 많은 고대소설을 접하였다. 그녀는 소월이 4살 때, 소월의 숙부 김학도에게 시집을 왔다. 김학도는 배재학교를 졸업하고 일반에서 대학을 나와 주로 외지를 떠돌며 생활을 하였고, 신의주에서 신여성과 동거하는 등 아내 계희영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소월은 틈만 나면 숙모 계희영에게 달려가 이야기 해 주기를 졸랐다. 그때 주로 얻어 들은 고대소설「옥루몽」,「장화홍련전」,「춘향전」,「심청전」,「옥루몽」,「삼국지」등이었다. 그 밖에 여러 전설과 설화 등도 빼놓지 않았다. 소월의 대표작 「접동새」나 「물마름」은 모두 어린 시절 숙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해서 쓰여진 작품이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한권, 동화 한 권 구해 보기 힘들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숙모의 이러한 이야기가 꿈 많은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그의 문학 세계를 형성함에 있어 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그의 시세계에서 자아내는 전통적 분위기와 향토적 소재의 차용, 민요적 가락과 설화적 내용의 시화(詩化). 한과 슬픔에의 침잠 등은 그의 숙모에게서 들은 고대 소설 및 설화의 세계에 유사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시기의 영향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소월의 숙모 계희영은 소월에게 정서적 충격과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눈뜨게 해주었고, 부모에게는 단절되었던 대화의 통로였다.

인물 > 문학인

장용학 생애

장용학은 1921년 4월 25일 함북 부령에서 태어났다. 1940년 경성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校] 상과(商科)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청진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7년 9월에 월남했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작가 수업을 시작해 1948년 처녀작 〈육수 肉囚〉를 탈고했다. 1950년 단편 〈지동설 地動說〉, 1952년 단편 〈미련소묘 未練素描〉가 〈문예〉 지의 추천을 받아 본격적으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말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51년 1월에 부산으로 피난했고, 1951년 11월부터 1955년 10월까지 무학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이 무렵 〈찢어진 윤리학의 근본문제〉(1953)․〈인간종언 人間終焉〉(1953)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경기고등학교 교사(1955. 10~1961. 6), 덕성여자대학 조교수(1961. 8~1963. 2)로 교육계에 몸담았고, 경향신문 논설위원(1962. 1~6), 동아일보 논설위원(1967. 1~1972. 10)으로 언론계에 종사했다. 그리고 1989년 8월 31일 사망했다. 그가 소설가로서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1955년 단편 〈요한시집(詩集)〉(현대문학)과 〈사화산 死火山〉(문학예술), 이듬해 중편 〈비인탄생 非人誕生〉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사상계〉에 연재한 장편소설 〈원형의 전설〉(1962. 3~11)은 그의 관념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전쟁의 비극을 파헤친 문제작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한 장편 〈청동기〉(세대, 1967. 8~1968. 3) 이후 작품활동이 뜸하다가, 1987년 11월 〈현대문학〉에 중편 〈하여가행 何如歌行〉을 발표한 이후 일체의 활동을 끊은 채 침묵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비관주의적 세계 인식이라는 근본 태도와 함께 리얼리즘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이상․최명익으로 이어지는 한국 관념소설의 계보를 잇고,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내면 묘사를 위주로 했던 모더니즘 소설의 전위적 문예기법을 수용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자 사용론을 고집해 이희승․이가원 등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1969)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기성문단과 교유하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이외 주요 작품으로 희곡 〈일부변경선근처 日附變更線近處〉(현대문학, 1959. 7~9), 단편 〈현대의 야(野)〉(사상계, 1960. 3)․〈유피 遺皮〉(사상계, 1961. 8)․〈상흔 傷痕〉(현대문학, 1974. 11), 중편 〈효자점경 孝子點景〉(한국문학, 1979. 1)․〈오늘의 풍물고(風物考)〉(현대문학, 1985. 6), 교양서 〈허구의 나라 일본〉(일월서각, 1984) 등이 있다. 미완성 유고소설 〈빙하기행 氷河紀行〉(문학사상, 1999. 10)을 남겼다.

인물 > 문학인

모더니즘시인 김수영

김수영은 모더니즘의 가장 아래서 본격적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면서도 \'한국 모더니즘의 위대한 비판자\'라는 평가를 얻기에 이란, 한국 현대문학사상 가장 도전적이고 문제적인 인물 중의 하나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하나의 예술이념으로 자리잡은 모더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아마도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예술적 저항일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시작된 한국의 모더니즘은 이러한 내용의 진보성을 수용했다기보다는 근대의 외형적인 것들에 대한 무비판적 경사와 모더니즘 문학의 실험적 형식의 피상적 수용에 머무른 바가 크다. 그것은 식민지적 상황의 강제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감상주의와 편내용주의의 극복'이라는 당대 모더니즘 나름의 전략의 소산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1940~50년대에 다시 전개된 2차 모더니즘운동도 진보성을 표방하고 인식의 세계적 지평으로의 확대를 지향하는 등 모더니즘의 내용적 수용에 접근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당대의 민족현실의 구체성에 뿌리내리지 못함으로써 단지 선언적 포즈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이 스스로 모더니스트이면서도 한국 모더니즘의 위대한 비판자가 되었다는 위와 같은 평가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 그의 문학은 이러한 한국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경지를 보여 주고 있을 것이다. 비판의식을 결여한 채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한국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현대성'이라는 이념적 가치를 내걸고 자신의 시와 삶, 그리고 한국문학 전체와 한국의 현실 전체를 그 가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던 시인이었다. 그것은 한국적 근대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 나름의 고투의 과정이었다. 이전의 모더니스트이면서도 한국 모더니즘을 진정한 모더니즘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다.

인물 > 문학인

김기림

함경북도 성진 생. 시인. 평론가. 보성고 졸. 일본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거쳐 도호쿠제대 영문과 졸업. 1931-32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사이에 '고대(苦待)', '날개가 돋치면' 등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한 시를 발표, 문단의 각광(脚光)을 받았다. 그 후 '어머니 어서 일어나요'(1932), '오 어머니여'(1932), '봄은 전보도 안치고'(1932) 등을 발표했다. 1933년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상(李箱)과 함께 당시 모더니즘의 대표 주자로 활약했다.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으며, 특히 I.A.리차즈의 이론을 도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문학이론을 정립했다. (1935), (1935) 등 주지적 시론과 (1935), (1935) 등 중요한 시들을 계속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부 위원장을 활동하는 한편, 문학인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기도 했다. 김기림의 문학적 활동은 창작과 평론 활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감상주의에 대한 비판과 새로움의 추구로 요약된다. 그는 과거의 시들이 감상주의에 사로잡혀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고 명랑한 '오전의 시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김기림이 근대화와 그에 따른 물질문명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써, 시에서 역시 밝고 건강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초기의 김기림의 시들은 에 수록되어 있다. 중기의 작품들은 세계적인 불안사조의 유행과 근대화의 허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보여준다. 김기림은 시각적 이미지 또는 회화성만을 추구하는 시는 또 하나의 순수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시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장시 '기상도'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해방이 된 후, 그는 시의 정치적 문학의 사회 참여를 강렬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시대정신의 전달을 목표로 삼았던 중기의 입장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 시기에 발간한 시집 새노래 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강하고 희망찬 의지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전향한 후에 자신의 시론을 정리하였다. 시집에 [기상도)](1939), [새 노래](1947), 시론집에 [시론](1947), [문장론신강](1949). 6 25때 월북, 1988년 해금 조치가 되었다. 작품 활동을 보면, 시 '기상도'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모더니즘 이론을 충실히 이행 하려 하였으며, 현대시가 지녀야 할 주지성과 회화성, 그리고 문명 비평적 태도 등을 시도하려 애썼다. 1940년대에는 시론을 발표하면서 '겨울의 노래', '소곡' 등 서정과 지성이 결합된 선명한 시각적 영상이 두드러진 시를 발표했는데,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주지주의 시론 의 확립, 과학적 방법의 도입, 모더니즘적 시의 시도 등이다.

인물 > 문학인

김정한

김정한은 1908년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사리에서 출생했다.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다가 명정 학교를 거처, 23년 중앙고보에 입학, 이듬해 동래 고보로 전학하여 28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다닌 중앙 고보와 동래 고보는 반일적 성향이 아주 강했다고 한다. 김정한이 문학과 생애에 일관되어 흐르는 강렬한 민족의식은 이미 이때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그는 22살의 나이로 울산 대현 보통학교의 교사가 된다. 이 무렵부터 김정한은 문학에 간심을 두기 시작하여 동아일보 학예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취직한 그 해 11월 일제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 교원 연맹’의 조직을 계획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어둠 속에서 」란 단편은 바로 이때의 사정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짧은 교직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제일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932년 여름 방학에 귀향했다가 양산 농민 봉기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무렵 그는 사회의식이 강한 시와 소설들을 국내 잡지에 발표했는데, 그 중 「구제사업」이란 단편은 문제가 되어 전문 삭제되었다. 1933년 남해 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교단에 서면서 농민을 위한 문학을 해보려는 뜻을 굳혔다. 이에 대한 결실로 1936년 데뷔작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를 계기로 「옥심이」,「항진기」,「기로」,「낙일홍」등을 발표 하였다. 40년에 재직 중인 남명 공립보통학교의 교사직을 사퇴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경영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민족지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됨을 보면서 붓을 꺾었다. 해방 후에는 잠시 건국준비위원회 일에 관계를 했고, 1947년부터는 다시 교직 생활로 돌아가 49년 이후로는 해직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부산대학 교수로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그가 5.16직후까지 투옥된 횟수는 7차례에 달하고 있다. 1956년 해방 전에 썼던 작품을 모아 「낙일홍」이란 소설집을 간행했으나 66년까지 새로운 작품 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월간지 ‘문장’에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다시 주목할 만한 문단 복귀를 실현했다. 그 후 5년 동안 「축생도」,「수라도」,「뒷기미 나루」,「인간단지」,「산거족」,「사밧재」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71년에는 16편의 연작이 수록되어 있는 제2창작집 「인간단지」를 발간했다. 김정한 생애를 볼 때 식민지 시대에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하고, 일제가 물러간 후에도 진정한 의미의 해방을 위하여 수차례 투옥되는 등의 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모순된 사회의 부조리한 측면에 대해 고발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물 > 문학인

이상 생애

李箱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그는 1910년 음력 8월 20일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장남으로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해경이란 이름은 그의 조부 김병복이 지어준 것으로 바다와 같은 넓은 곳을 다스리는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부 김병복에게는 두 아들 연필과 연창이 있었다. 연필은 아버지 대에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켰으며, 이조의 전형적인 중인 계급에 속하는 총독부 상공과 관리였다. 李箱의 친부인 연창은 연필의 도움으로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을 하다가 사고로 손가락 셋이 잘려 일을 그만두고 나와 이발업을 하였다. 연창은 李箱을 낳고 더욱 가난해져, 李箱은 세 살 때 백부 김연필의 집에 양자로 간다. 당시 김연필에게는 손이 없었으므로 李箱은 가문의 종손이라는 위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李箱은 세 살 때부터 백부 댁으로 가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성격 형성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시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애정결핍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성장 배경이 그에게는 정신적 외상, 즉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또한 연필이 만주 여행 도중 아들 있는 여자를 얻어 귀가하였는데, 이 여자는 李箱의 큰어머니로 자신의 친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李箱에 대하여는 온갖 구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어린 李箱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불안감은 점차 가중되었을 것이며, 심리적 강박관념은 애정결핍 상태를 가중시켜 중첩된 구조의 불안 현상을 일생동안 드러내게 된다. 나아가서 성 도착증적인 요소까지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공포 감정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여성관과 결합하게 된다. 그래서 李箱의 문학에 나타난 여성은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며 다시 말하면 李箱의 여성관은 의식적인 의존물이상의 것 외에 값어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 李箱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낳아준 부모보다는 백부와 백모의 시선을 더욱 의식해야 했고 더욱이 김씨 가문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조부에 대한 억압심리로 인해 그의 개성은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부모가 백부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계심이 불안심리로 전이되었고 동시에 위기의식도 동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문학관은 증오와 소외, 불안과 위기, 공포와 탈출의 연속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물 > 문학인

김수영의 생애

김수영은 6․25를 거치면서 인간의 삶의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개인적 정서에 초점을 맞춘 시기, 4․19 기간의 감격과 좌절을 표현한 시기, 소시민적 삶의 비애와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사회적 삶의 조건을 내면화한 시기로 논의할 수 있다. 유아 시절의 환경 김수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시인이다. 그의 성장기의 주된 삶의 공간이 도시라는 점은 그의 시가 전통 서정시의 공간인 농촌이나 전원이 아닌 도시를 배경으로 적극 차용하는 모더니즘적 성격을 지니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가 두 자식이 사망한 뒤 태어난, 병약한 맏아들이라는 점도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받음으로써 자아 중심적인 고집 불통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후에 그가 이어령과 벌이는 참여시 논쟁이나 시론 등에서 강하게 표출되는 타협을 모르는 신념의 고수는 유아기의 환경이 주요한 인자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유년기 김수영은 1921년 김태욱의 셋째 아들로 종로 6가에서 태어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위로 형제들이 일찍 사망한 관계로 부모 형제들의 걱정과 근심 속에서 자랐다. 그가 남긴 사진을 보면 한 번도 그의 몸집에 살이 오르거나 건강하게 보이는 일이 없다. 다만 그의 크게 뜬 눈 만이 형형할 뿐이다. 그는 겁이 많고 외로운 아이로 자라났다. 어느 식구나 친구와도 다정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첫사랑 김수영은 [낙타과음] 이란 제목의 산문에서 '나는 그 소녀를 따라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 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고 적고 있다. 해방 직후의 김수영 1944년 2월 김수영은 일본의 징용을 피해 귀국했다. 그 때 김수영 집안의 가계는 몰락 지경에 이르러 이모가 사는 만주 길림으로 모두 떠난 뒤였고 김수영은 고모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수영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 그는 명동 부근에 박상진이 설립한 청포도 극단을 찾아갔다가 종로 2가에 말리서사란 헌 책방을 내고 있는 박인환을 만나게 된다.

인물 > 문학인

원효 사상의 생애

원효의 성은 설이요.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며 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고 한다. 고향은 압량군 불지촌이다. 신가 제 26대 진평왕 39년에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서당이고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15세 이전에 세속의 학문을 통달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불법을 배우고자 15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삼장을 모두 공부하였으나 원래 총명하여 불법의 오의를 자득하였고, 특정한 스승에게 배우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약간의 기록에 의하면 낭지.보덕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현장 법사가 서역 천축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태종의 보호아래 역경사업을 벌이고 유식.법상학을 강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나 유학 길을 가던 도중 고구려 순찰병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 간신히 돌아왔다. 이에 원효는 항상 마음가운데 당나라로 떠나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문무왕 원년 45세에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향했으나, 유학 길을 떠나던 도중 유심소조의 원리를 깨닫고 당나라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다. 일체유심조의 원리를 알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이후 무애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무애행의 대표적 내용으로는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고 나서 옷을 속복으로 갈아입고서 소성거사라 칭하면서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면서 대중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하는 대중교화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대중교화를 위해서 무애행을 하였으나 전통적인 승려와 식자들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서 왕실에서 베푸는 각종 불교 행사에는 참가하지도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원효의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결국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에 대한 소를 짓고, 그 강의를 위해서 다시 중앙의 불교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리고 다시 혈사로 돌아와 수행하던 중 686년 입적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리된 원효의 행장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통설이다. 그러나 여기 간략히 소개된 행장가운데서 원효의 깨달음이나 사상체계와 관련해서 주의깊게 보아야 될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이유와 시도 횟수, 경론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의 시점, 환속의 시점, 학승으로 복귀의 시점등이다.

인물 > 문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