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9.3~1603.3.23)는 그리니치 출생으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이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카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 어스컴에게 그리스 ․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에스파냐 왕 펠리페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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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정조(1752년 ~ 1800년) 조선 제22대 임금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 8살에 왕세손에 임명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함 10살에 영조의 맏아들 진종의 양아들로 입적 1775년에는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대리청정 1776년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 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됨.
영조 (英祖)
영조 (英祖 1694∼1776) 조선 제21대 왕(1724∼76).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이름은 금(昑). 숙종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숙빈최씨(淑嬪崔氏)이다. 비는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노론(老論) 김창집(金昌集) 등의 건의로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어 노론측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하여 일단 허락을 받았으나 소론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노론이 실각하자 지지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724년 즉위하여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 주동자들을 숙청하고 노론정권을 수립하였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蕩平策)을 기본정책으로 당쟁의 방지에 힘썼다. 한편 가혹한 형벌과 남형(濫刑) 등을 폐지하여 인권을 존중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의 어려운 일을 직접 알리게 하였다. 경제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역(軍役)을 감소시켰다. 또한 사회정책에 힘을 써 서얼(庶孼)도 관리로 등용하였고,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으며, 동색(同色)간에 혼인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국방에서는 진보(鎭堡)의 신축, 성(城)의 개축, 군기(軍器)의 수급, 해골선 및 화차(火車)의 제작 등에 힘썼다. 그리고 《속대전(續大典)》을 편찬, 법령을 정비하였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소학훈의(小學訓義)》 《여사서(女四書)》 《누주통의(漏籌通義)》 《무원록(無寃錄)》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 재야에서 기반을 넓히던 실학(實學)에 이해가 깊어 실학풍을 진작시켰으며, 풍속·도의(道義)의 교정에 힘쓰는 등 사회·문화·산업·예술의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는 등 비극이 있었으나, 조선 역대 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고 각 방면에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九里市)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장희빈
희빈 장씨(?∼1701, 숙종27) 숙종의 빈. 역관 장현의 종질녀. 어머니의 정부 조사석과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서 왕의 총애를 독점. 1686년(숙종 12)에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있을 때 왕자 균(경종)을 낳아 이듬해 균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이 해 기사환국(1689)으로 원자 책봉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남인에 의해 패배 당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가자 이들의 지지를 받아 1690년 원자가 세자로 책봉됨과 함께 폐위된 민비의 뒤를 이어 정비로 책립되었다. 그러나 1694년 김춘택 등 서인의 민비 복위 운동으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이 제거되고 민씨가 복위하자 희빈으로 격하되고, 1701년 죽은 민비를 궁인, 무녀 등과 함께 저주했다는 무고(무술로 남을 해치려고 함)의 옥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숙종은 이 뒤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공민왕
고려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국적/왕조 : 고려 재위기간 : 1351년∼1374년 본명 : 전 별칭 : 초명 기,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 활동분야 : 정치, 미술, 서예 [출처] 공민왕 [恭愍王 ] | 네이버 백과사전 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 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 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