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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한말의 의사·문신·국어학자.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태원(太原). 아버지는 익룡(翼龍)으로 시문 및 의술에 능했다.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姜瑋)의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다. 일찍이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한의(漢醫) 박영선(朴永善)이 오다키[大瀧富川]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가 지은 〈종두귀감 種痘龜鑑〉을 얻어 가지고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았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자,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가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종두법을 배웠다. 12월 하순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의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러 2세 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여 성공하자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1880년 5월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 내무성 소속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두묘의 제조와 저장법, 독우(犢牛:송아지)로부터의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등을 배우고 두묘도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일본 공사관 소속의 의사와 접촉하면서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일본인으로부터 의술을 습득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했으나 그가 설치한 종두장은 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해 10월 개화에 관계되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적을 수집·간행하고, 각 지방에서 추천된 사람들로 하여금 각종 문물을 익히게 하여 개화사회를 이룩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를 했다. 1883년 여름 전라도암행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으며,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치했다. 1883년 3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을 지냈다. 1885년에는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우두신설 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강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 重麥說〉과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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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생애

백범은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고종 30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가 되고 1894년 팔봉도 소 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동학혁명군이 패배한 그 다음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소년 장군의 몸이었으나 동학에서 불 붙어온 왜놈에 대한 적개심으로 왜놈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칼을 빼앗아 왜놈의 가슴에 꽂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빨아먹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백범의 의로운 행위는 비단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백범은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 때 일인에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18 99년 환속, 1903년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농촌 계몽 활 동을 하였다.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역임하고 1926년 6월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즉각적으로 임시정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 이 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 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 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해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란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 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다 해방을 맞았다. 결국 광복군 훈련에다 열중하다 해방을 맞았을 뿐, 백범의 유격 전술은 국내에서 불을 당기지는 못하였다. 해외에 있던 백범도 "올 것이 너무 일찍 왔구나!"하고 땅을 치며 울 정도였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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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 대한 종합적 고찰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실격하였다.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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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의 생애와 사상

한서(翰西)남궁 억(南宮 檍,1863-1939)은 한말에서 일제 치하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다. 한서가 생존하였던 시대(1863년:철종 14년-1939년:인제 치하)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말 이후 노정된 양반 정치의 파탄과 민중의 반발, 서세동점에 대한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서구 열강의 침투와 일제의 침략 등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내적, 외적 도전에 대해 우리는 미처 응진 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대를 통하여 수구가와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고 새로운 세계사적 동향에 눈을 뜬 많은 우국지사와 선각자들이 사회 각분야에 걸쳐 애국계몽운동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특히 교육에 있어서는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과 더불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몸소 실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한서 남궁 억의 자(字)는 치만(致萬), 이름은 억 (檍), 호는 한서(翰西), 본관은 함열이다. 1863년 12월 27일 서울 왜송동에서 철종 때 중추도사를 지냈던 아버지 남궁 영(南宮 泳)과 어머니 덕수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명문에서 태어난 한서는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홀어머니의 바느질품으로 근근하게 꾸려 나가는 가정 형편으로는 서당에 다니기도 어려웠으나, 다행이 이웃에 사는 이사과(李司果)댁 사숫에 다니는 것을 허락 받아 사서삼경 등 한문을 공부하여 정통하게 되었다. 21세(1883년)에 그때까지 공부하던 한학을 그만두고 관립영어학교에 임학라였으며, 1년간 불철주야 정진하여 가장 우수한 선적으로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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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출생 배경

김두한 자신이 말하는 출생배경을 들어보면,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년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와 안창호 등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다 1916년 즈음에는 노백린 등과 광복단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김두한의 얘기는 그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김좌진이 서울 근교 야산(사직공원 뒤)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일경들이 이를 알고 들이닥쳐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좌진은 동지들을 대피시킨 뒤 홀로 일제 순경들을 상대해 때려눕히고 자신도 도피했다. 쫓아오는 일경들을 피하기 위해 사직동의 어느 양반집의 담을 넘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집은 궁녀 박 상궁의 집이었고 그 방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방이었다. 박계숙은 그를 책장 안에 감추어 주었고 김좌진은 위기의 순간을 넘겼다. 책장 안에 있던 그는 간이 크게도 잠이 들었고 그 사이 박 상궁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날로 하인들을 고향으로 보내버리고 이후 모녀가 손수 김좌진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태어난 혁명아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통속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과장은 섞였을지라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 본 바 이는 거짓이라고 한다. 김두한의 생모는 박계숙이라는 양반집 딸이 아니라 김계월이라는 기생이었다. 1930년 1월,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국내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고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했다. 그 가운데 김두한과 관련된 최초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 이든 길림성 모처에 잇다는데 그의 칠십 노모와 그의 아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진씨를 합하여 세 식구가 있다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 사람이 있을 것 이라는데”(『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여기서 그의 아내는 그가 만주에서 결혼한 나혜국이고 칠십 노모는 장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외 모처에 있다는 김좌진의 서자가 바로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는 그 이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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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허준은 1546년(丙午, 명종 즉위년) 3월 5일에 공암(孔岩)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준의 할아버지는 무과 출신으로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평안도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륜이다. 허준은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아니라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대신 의과에 응시하여 의관이 되었으며, 주로 내의원에서 일하였다. 그는 선조 8년(1575) 2월 15일 의관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찰한 뒤 임금을 비롯한 궁중 인사의 병을 치료하였으며, 내의원에서 의술을 인정받아 내의(內醫)와 태의(太醫)를 거쳐 어의(御醫)에 올랐다. 어의로 활동하면서 왕자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선조로부터 궁상의 가자(架子, 정삼품 통정 대부이상의 품계)를 받았고, 1956년 유의인 정작, 태의인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등과 함께 의서의 편찬을 명받았으나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의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일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허준은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임금을 수행하여 후에 1604년 6월 25일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 이후 의서의 편찬이 허준 단독에게만 맡겨지고 궁에 보관된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선조의 배려 속에 편찬을 진행하였고 1600년 10월 우두머리 의사였던 양예수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1608년 집필이 절반도 이루어지기 전에 선조의 죽음을 맞아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허준이 매우 차가운 약을 망령되어 썼다고 하며 탄핵을 요구하며 귀향을 보내고 죄줄 것을 광해군에게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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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a)n]

몬드리안은 1872년 3월 7일 네덜란드 Amersfoort의 엄격한 캘비니스트 집안에서 5형제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교육자이며 아마츄어 화가인 아버지와 직업화가인 백부의 지도로 일찍부터 미술교육을 받고 미술교사의 자격을 획득하여 교직에 몸을 담았으나 생애를 여기에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 후 1892년 중등 미술교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미술애호가 협회인 Utrecht society "Kunstiifde"의 회원이 되고 Amsterdam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August Allebe의 지도를 받았으며 미술학교(State Academy) 야간부에 들어가 경제적 곤란으로 초상화, 고전명화의 복제, 식물도감, 풍경화 등을 그려서 팔기도 했다. 1894년 몬드리안은 처음으로 신지학(Theosophy)을 접하게 되었고, 1897년 Arti et Amicitiae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1904년부터는 인상파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해 2월부터는 초상화를 그리고 회화지도를 하였다. 1907년도에 몬드리안은 국립미술관에서 Cezanne, Van Gogh의 그림을 대하고 큰 영향을 받았으며 Amsterdam의 The Four year Exhibition에서 Kees Van Dongen, Otto Van Rees, Jan Sluyters 등에 의하여 제작된 야수파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08년에는 st Luke의 봄 전시회에서 몬드리안의 그림이 미술평론가의 관심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1909년 1월 Amsterdam의 Stedslijk 미술관에서 Jan Sluyters, C.Spoordhk 삼인전을 가졌으나 비난을 받았고 다시 Spoor와 Domburg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해에 신지학(theosophy)협회에 가입하였다. 1912년 몬드리안은 급격히 추상주의로 나가면서 서명의 철자를 Mondrian으로 하였다. 그 후 2년 뒤에 수평선과 수직선을 교차시킨 십자형에 의한 구성을 시도하였고, Domburg에서 『교회의 탑』,『선창과 바다』,『+, -의 구성』을 제작하고 미술에 대한 수필을 저술하였다. 그 시기에 반도스 부르크와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1917년 10월 『데 스틸(De Stijl)』의 초판이 발행되었다. 『데 스틸』지에서는 첫 번째 기사로 『회화에 있어서의 새로운 형태』를 기고했으며, 『자연적 리얼리티와 추상적 리얼리티』를 기재하였다. 1920년에는『Neo-Plasticism』선언을 출판하고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삼원색과 무채색의 구성에 의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1925년에 반도스 부르크와의 불화로 『데 스틸』을 이탈하고,『Neo-Plasticism』의 번역판을 Bauhaus에 의해 『새로운 조형(Die neue Gestal-tu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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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이이(李珥)의 본관은 덕수(德水)로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롤 한다. 이돈수는 최충헌이 집권하던 고려 고정 5년에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서북면 원수인 조충(趙沖)의 부하로써 함께 싸워 무찌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1대조 양준(陽俊)도 중랑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고려의 왕통이 끊길 때까지 4대에 걸쳐 계속 벼슬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이의 선대는 계속 벼슬길에 올랐는데, 6대조인 양(揚)은 공조 참의 벼슬을 지냈으며, 특히 5대조 명신(明晨)은 청원군 심종(태조 이성계의 둘째딸과 결혼)의 사위가 되어 ‘척리(왕실의 외척)의 인척’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부인 추(抽)와 증조부인 의석(宜碩)도 각각 지온양군사와 경주 판관을 역임하였다 조부 천(蕆)은 의정부 좌참찬 벼슬을 지냈으며, 아버지 원수(元秀)는 현재의 법무부 중견 공무원급에 해당되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이의 외조부는 진사 신명화(申命和)였으며, 외조모는 어버이와 남편을 섬기는 데 도리를 다해 일찍부터 인근에 소문난 사람으로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의 병을 낫게 하여 열녀문을 지어 표창받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딸 이이의 어머니 사임당은 서화에 능하고 효행이 뛰어난 부덕(婦德)을 두루 갖춘 부인으로 평가되어 오늘날까지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처럼 이이의 부계와 모계는 대대로 관직을 지낸 중앙의 선비 집안과 인근에 평판이 높았던 유학자 집안이었다. 이원수와 사임당 사이에서 장남 선과 장녀 매창, 아들 번, 우와 두 딸, 그리고 이이가 탄생하였다. 그의 태몽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하여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었다. 이이의 천재적인 재주를 7세에 산수화를 그린 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의 입산 출가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종실록』명종 21년 3월 24일조에 “이원수가 일찍이 불경을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507년 조선조에 승과가 폐지된 이후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가 새로운 부흥의 기운을 맞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로 본다면 이원수가 불교 서적을 읽는 일이 당시 시대 분위기에 크게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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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Sartre, Jean Paul)

사르트르(Sartre, Jean Paul)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한 해군 기술 장교의 아들이었던 사르트르는 1907년아버지를 잃게되고, 그후 어머니와 함께 외가쪽의 조부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1915년 사르트르는 앙리 4세 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어머니의 재혼과 의붓 아버지의 근무처 관계로 라 모세르로 옮겨 이곳의 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사르트르는 19세때, 세 살 연상의 미녀 카뮤와 열렬한 연애를 하였다. 그러나 카뮤는 연출가인 듀랑과 결혼하고 , 교우(校友)는 이어졌다 하더라도 일응의 결말에 다달았던 것이다. 카뮤와의 관계가 끊어지자 사르트르는 자신과 동등한 지성을 가지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념(情念)을 가진 여성을 보브와르(Beauvoir, Simone de)에게 구하고 있었다. 보브와르는 같은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는 동창생이었으며, 그들은 인간적으로 또 학문적으로 서로 친애하는 정을 더욱 깊게 하였다. 1929년 어느날, 사르트르는 보브와르에게 “2년간의 계약결혼을 맺자”고 제안했고, 보브와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후 그녀는 사르트르의 정식 결혼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평생을 함께 계약결혼으로 살았다. 사르트르는 1929년까지 파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고, 여기서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33년에서 1934년까지 사르트르는 독일에 유학해서 하이데커와 훗설의 철학을 배웠다. 1938년 그의 처녀작인 소설 『구토(嘔吐)』를 출판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사르트르는 포병대 기상병으로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되었으며, 1941년 파시스트의 전쟁포로에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와 고등중학교에 복직하였다. 1943년에는 대작『존재와 무 :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를 발간하였다. 1946년 이후 사르트르는 소부르주아적인 지식인 잡지《현대 : Les Temps Modernes)》의 발간을 주도 하였다. 1951년 무렵까지의 사르트르는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 정당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이것과 달리하는 입장에서 이것을 비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1952년 앙리 마르땅의 석방운동, 반리지웨이 데모, 공산당부서기장 듀크론에 대한 체포에의 항의 운동, 이들 사건을 통해서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가 서서히 깊어 갔고, 좌파 입장에서 우파를 공격하기 위해『공산주의와 평화』를 썼으며, 마르크스주의와의 접근은 강화된다. 1957년 헝가리 사건 특집호에 『스탈린의 망령』을 발표하였고, 1959년에 『알르토나의 유폐자(幽閉者)』를 발표하여 알제리의 독립전쟁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탄압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자세를 표명하였다. 1960년에 『변증법적 이성비판(Critigue de la raison dialectigue)』의 출판은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필연적인 철학”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공식적인 상을 거부했는데,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이나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은 물론이고 1964년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으나 거절하였다. 사르트르는 철학자이며 소설가이고 희곡 작가이다. 그리고 그는 문학비평 및 이론가, 정치투쟁가, 논쟁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철학자였으나, 1980년 4월 15일 파리에서 삶을 마감하고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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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쯔 리스트 (Franz List)

프란쯔 리스트 (Franz List, 1811~1886) 프란쯔 리스트는 헝가리 태생이지만 유럽 전역의 국제적인 시민이었다. 그는 유럽의 유명한 작곡가들의 작품과 그 자신의 것들을 포함하여 전 생애에 걸쳐 연주여행을 하며 보냈다. 일반적으로 리스트의 가곡들은 그의 오케스트라나 피아노 작품들에 가려진다. Watson은 리스트의 작품을 기록해 놓았는데 . 총 82곡들로 번호가 붙여진다. 리스트는 1848년까지 쓰인 곡들 가운데 30여 곡들을 다시 수정하였고, 네 곡은 세 가지 버전으로 작곡하였고, 여덟 곡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새로 집어넣었다. 그 밖의 성악 작품들은 두 개의 오라토리오와 네 개의 미사곡들이다. 거의 모든 곡들이 리스트 자신에 의해 다른 형식들로 작곡되거나 편곡되어 남아 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시도보다 더 향상된 작품을 바라는 그의 욕구를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리스트의 가곡들은 상당한 크기의 목소리와 극적인 톤으로 불러질 때 가장 적합하다. 리스트의 가곡들은 멜로디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담고 있다. 폭넓은 선율적 다양성에도 불고하고. 리스트는 종종 가사에는 소홀함을 보인다. 그러나 그의 후기 가곡들에서는 리듬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대단한 섬세함으로 가사를 다루고 있다. 리스트는 그의 가곡에서 자구 리듬 동기들을 사용했는데, 종종 곡 전체를 하나의 동기를 중심으로 세워나가는 것도 볼 수 있다.그는 곡들을 위해 통작형식을 선호했는데. 이 형식은 그의 감정적, 색채적인 작곡기법을 위한 보다 더 넓은 장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반주는 보다 화려한 색채적 사용의 피아노 수법들을 보여주고 어떤 곡들은 오케스트라의 구조를 보인다. 그의 가곡들이 점점 발전되어 가면서는 그의 화성에 대한 실험들이 더 증폭되고 시와 음악의 결합이 더 가까워지면서 피아노와 성악의 짜임새가 자연스럽게 합쳐진다. ❀Es muss ein Wunderbares sein 이것은 틀림없이 놀라운 것이다. 1852 (oscar von Redwitz) ➫이 충실한 음악은 두 영혼의 가랑의 화합에 대한 시인의 묘사를 강조한다. 리스트는 마지막 두 행을 반복한다. 첫 키스에서 죽음까지 그들은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리스트의 특징으로 보이는 풀이 죽은 음정들은 중얼거리는 성악 악구들에서 보인다. 사랑스러운 선율은 반주부에서 만들어지는데. 주로 코드들에서 만들어진 단순한 형태이다. 시는 두 연으로 되어 있지만 음악은 통작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리스트의 표현적인 음악적인 취급은 슈만이나 브람스의 방법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의 조용한 서정적인 스타일에서 더 그렇다. 그는 이 곡을 바이마르 근처의 에테르스부르그에 프러시아의 아우구스타 공주와의 점심과 저녁 사이에 이 리트를 작곡했다. 이 곡의 음악적인 설계의 단순성은 리스트의 다른 리트들과는 구별되어 당당히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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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슈트라우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왈츠의 왕'으로 불리며 '왈츠의 아버지'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빈 왈츠' 형식을 확립하여 싱코페이견(당김음)과 세 잇단 음표를 왈츠의 리듬과 대조시킴으로써 미묘하면서도 산뜻한 효과를 거두었다. 곧 슈트라우스가 빈의 실용적인 춤곡의 새로운 전통을 창시 한 것이다.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에게서 빈 왈츠를 인계받아 최고도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처음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아들에게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게 했다. 그의 뛰어난 음악천품의 인하여 19세 때에는 이미 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여이름을 날렸다. 184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악단을 인수하여 유럽 각지를 순방하여 그는 명성을 높였다. 30세 때는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페트로포로프스키 공원의 하기 연주회 지휘자로 10년간 계약을 맺기도 했다. 38세 때는 오스트리아 궁정 무도회의 지휘자로서, 45세 이후에는 오페레타를 적지 않게 작곡하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500여곡의 왈츠곡을 비롯하여 오페레타 ' 박쥐','집시남작' 등 16개나 되는 오페레타가 있다. 그는 간소한 관현악법으로 작품을 썼는데 극히 효과적으로 처리하였다. 또 경쾌하고도 친밀감이 있도록 하여대중의 오락성에 맞도록 했다. 극히 청신하고 건강한 감각을 왈츠에 담아 왈츠의 수준을 크게 높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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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Thales)

탈레스(Thales,B.C.640? ~ 546) 천지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대한 최초의 학설은 그리스의 철학자인 탈레스의 설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의 시조이다. 그는 그 당시 세계의 상업 중심지였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으로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큰 배와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이집트와 인도 등지를 사업 목적으로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얻은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탈레스는 일반적으로 과학, 수학, 철학의 창시자라 불려진다. 그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동방의 전통적 지식을 받아들여서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하여 당시의 자연관을 변혁하였다. '나일강의 물로 곡식이 열매를 맺으며, 그 곡식을 먹고 인간과 동물이 살아간다. 나무나 물고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물이 없으면 자랄 수 없다. 따라서 동물이나 식물 등 모든 생물은 물로써 만들어져 있다'고 주장했으며, 물은 풍부하게 있으며 원판모양의 대지 위와 아래에 물이 있어 비는 위의 물이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는 물이 흩어지면 안개와 구름으로 , 물이 뭉치면 얼음과 바위로 된다고 하였고,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까지 보았다. 탈레스는 예리한 직관력으로 자연을 추리하고 논리화하여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신의 개입없이(자연현상을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탈레스는 태양의 일식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당시 메디아인과 리디아인의 전쟁중에서 탈레스가 예언한 일식이 기원전 585년 5월28일 정확히 일어나는 것을 평화의 조짐으로 생각해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중단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탈레스는 수학적 발견과 관련되어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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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Caravaggio)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 발표된 그에 관한 비평은 16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앞의 3년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비평은 이렇게 말한다. "2주간의 작업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 두 달간 칼을 들고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그를 고의로 살해한다. 다음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년간의 활동을 뒤로 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바로크 양식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사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들로 인해 비난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점차 인정받게 되어 유명해진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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