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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프리드릭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게오르그 프리드릭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은 1685년 2월 23일 중부 독일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 바이센펠스(Saxe Weissenfels) 공작의 이발사겸 외과의사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로서 신앙이 두터 운 분이었다. 바흐와 달리 헨델의 집안에는 대대로 음악가가 나지는 않았으나, 헨델은 소년 시절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7세가 되던 해에 바이센펠스 궁정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 그의 음악을 들은 바이센펠스 공 작은 크게 감동을 받고, 헨델의 아버지에게 음악공부를 시키라고 권유하였다. 헨델 의 아버지는 원래 헨델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차하우(F. W. Zachau)에게 보내어 음악공부를 시켰다. 이후 헨델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뛰어난 연주자가 되었으며 바이올린과 오보에 등 여러 악기를 배우고, 화성학과 대위법의 기초를 쌓는가 하면, 당시의 통상적인 학습 방법대로 유명한 작곡가들의 악보를 사보하면서 공부하였다. 확실치는 않으나, 헨델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1702년에 할레대학에 입학해서 일년 남짓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 중에도 헨델은 칼뱅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703년, 헨델은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가지고 할레대학을 떠나 단시 오페라의 중심지인 함부르크(Hamburg)로 갔다. 이 곳에서 처음에는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다가 후에는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된다. 이 즈음에 헨델이 사귀었던 음악가들은 마테존(Johann Mattheson)과 당시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 감독이었던 카이저(Reinhard Keiser)였는데 이들은 음악 동료로서 헨델의 작품 활동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함부르크에 있으면서 헨델은 와 , 한 편의 오페라를 둘로 나눈 작품 와 를 작곡하였는데, 이 중 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오페라 이외에도 건반악기 작품을 포함한 많은 기악곡이 이 기간에 작곡되었다. 1706년 헨델은 함부르크에서 알게 된 이탈리아 메디치가(Medici家)의 페르디난도(Ferdinando) 왕자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갔다. 이탈리아에 3년간 체류하면서 베네치아, 나폴리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많은 귀족들과 유명한 작곡가들을 만났으며, 로마에서는 그가 체류하던 루스폴리(Francesco Ruspoli)공작을 위하여 약 150여 곡의 세속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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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1875년 1월 14일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알자스가 프랑스령(領)이 되었으므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그 사이에 《음악가·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 Sebastien Bach:le musicien-poète》(1905) 《예수전(傳) 연구사》 등을 발표하였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교 의학부의 청강생이 되어 의학을 공부한 후 1913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자력으로 병원을 개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인이라 하여 포로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고 그의 병원도 폐쇄되었으나 아프리카 생활의 회상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Zwischen Wasser und Urwald》(1921)의 출판을 계기로 그의 인간과 사업이 점차 세인의 주목을 끌기에 이르렀다. 이에 힘을 얻어 다시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재개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큰 병원을 이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도와 진료에 전렴하였는데, 재차 아프리카로 건너갈 무렵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려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1928년에는 괴테상(賞)을 수상하고, 1951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195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그는 노벨상의 상금으로 나환자촌(癩患者村)을 세웠다. 1960년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가 독립하여 가봉공화국이 되었으나 흑인들의 그에 대한 경외(敬畏)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새로 창설된 적도성십자훈장(赤道星十字勳章)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90세의 생일이 지나고부터 건강이 나빠져서 1965년 9월 4일 전세계인의 애도 속에 죽었다. 그는 신학자로서는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고, 철학가로서는 칸트를 연구하였으며, 독자의 윤리관인 ‘생명의 경외’를 주장하였다. 음악가로서는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간 개량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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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신사임당 [申師任堂, 1504(연산군 10) ~ 1551(명종 6)] 조선시대 문인·서화가.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思任堂)은 당호(堂號)이며, 임사재(妊師齋)라고도 하였다.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의 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혔으며, 문장·침공(針工)·자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 등의 한시(漢詩)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며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섬세함을 더하여 후세의 시인·학자들의 절찬을 받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으로 사실화였으며, 채색화·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수 있었던 동기로는 남성 우위의 유교사회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지녔기 때문인데, 즉 출가 뒤에도 친정에서 생활함으로써,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 등과 6폭 초서병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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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에티엔 파스칼(Etiene Pascal)은 재정문제에 관한 소송을 판결하는 세무법원 판사로 있었다. 그의 누이가 쓴 ‘파스칼 생애’에 따르면 파스칼은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아주 적절하고 간결하게 대답을 했다. 또한 사물의 이치에 관한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추리력은 그가 커가면서 더욱 풍부해졌고, 언제나 제 나이 또래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162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버지는 더욱 가족을 소중하게 대했다. 특히나 외아들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파스칼을 큰 애정을 가지고 키웠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아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스스로 파스칼의 교사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파스칼은 학교라고는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오로지 아버지를 선생으로 가졌다. 1631년, 그의 아버지는 은퇴하여 파리로 갔고, 그때 파스칼은 8살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스칼이 지식을 다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느 아이들보다 더 늦게 가르쳤다. 예를 들어, 라틴어를 더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파스칼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언어가 무엇인지를 일반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 것들을 어떻게 일정한 규칙 아래 문법으로 바꾸어 놓는지, 또 이 규칙들이 주의해서 구별해야 할 예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든 언어를 국가들 간에 통용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가 그것을 배우게 되었을 때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았고, 그래서 가장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문제에 정확히 전념할 수 있었다. 에티엔 파스칼은 처음 가르칠 때, 파스칼에게 수학(기하학)을 가르치면, 다른 공부에 소홀히 할까봐 먼저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같은 언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파스칼은 어떤 현상에 관심을 가지면 이유를 물었고, 그 이유에 오류가 있다면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12살에 그는 스스로 유클리드 기하학 32번 명제까지 풀었고, 1635년 이후 아버지와 함께 수학연구를 시작했다. 이에 메르센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모임에 가담한다. 1648년 파스칼은 『원추곡선시론』(Essai pour les coniques,1640)을 저술하였고, 1652년에 계산기를 완성하였다. 1646년 가을에는 물리학 연구, 무엇보다도 진공과 유체(流體)의 평형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이러한 작업 가운데서 심각한 중병에 걸리게 되는데, 이후 그는 지속적인 병의 고통을 감내하며 생활해야만 했다. 1652~1654년에 파스칼은 의사에 권궈에 따라 모든 종류의 정신집중을 피해야 하고 기분전환 시킬 기회를 찾기 위해 사교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당시 『산술삼각론』(Abhandlung uber dasaritbmetische Dreieck)이라는 저서를 썼고, 확률론(Wahrscheinlichkeitsrechnung, 우연의 기하학(geometrie du hasard))의 사상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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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루터는 독일의 삭소니(Saxony) 북서쪽에 있는 라이프찌히 근처의 아이스레벤(Eisleven)에서 광부 한스 루터(Hans ruther)의 아들로 1483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그가 법률가가 되는 것이 희망이었으므로 그는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501년, 루터는 옥캄(William Ockham)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당시 인문주의로 유명한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7자유학과와 법률을 배웠다. 그는 라틴 고전과 기독교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면서, 음악적 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1502년에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505년에는 석사시험에도 합격했다. 그 후 그는 종교적 신비감을 체험하고 복종, 청빈, 순결의 서약 아래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에 속하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1510년부터 1511년 까지 그는 수도원의 수사로서 로마에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로마여행에서 목격한 부패와 테첼(Johan Tetzel)의 면죄부 판매는 그를 분격하게 하여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문을 공개하여 종교개혁 심지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 때 루터는 `옛 초대 교회시대보다 현재가 더욱 사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종교개혁의 의지를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해에 그는 그가 성서학 박사(Holy Scripcture) 학위를 받았던 에르푸르트대학으로 돌아 왔으며, 그 후 비텐베르그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이 때에 루터를 분노하게 한 것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라는 타락상이었다. 1517년 면죄부판매 대행자인 테첼(Johan Tetzel) 수사가 교황에 의하여 포고된 면죄부를 팔기 위하여 삭소니 지방에 나타나자, 이에 대항하여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문을 공개하여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불을 댕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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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

1896년 스위스의 Neuchatel에서 태어난 Jean Piaget(1896-1980)는 의심 할 여지없는 세기의 아동발달심리학자이다. 그는 비정통적으로 인지발달 분야에 관여했다. Piaget는 먼저 그의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적응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훈련된 과학자의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면서 아이들의 놀이를 환경과의 대결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적응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11살 때, Albino라는 참새의 서식을 관찰하고 글을 써서 Neuchatel의 박물학 학술지에 기고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이처럼, 그는 어린시절부터 자연현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자연 속에 서식하는 새, 물고기 등 의 행동을 즐거이 관찰하곤 했는데, 어린시절부터 생물학에 비범한 재능을 보인 그는 나이 21살인 1918년에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물학에 비범한 재능과 흥미를 보인 피아제의 시야가 그의 대부인 Samuel Cornut가 보기에는 너무 생물학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Cornut는 피아제에게 Bergson의 철학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피아제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 하고 생물학 이외의 다른 학문분야에 관심 을 기울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철학, 종교,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분야가 넓혀졌고 다시, 여러 학문 영역과의 접촉은 피아제로 하여금 지식구성에 관한 철학적 명제인 인식론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따라 서 그는 지식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라는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 의 관념은 관념일 뿐이고, 하나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인 접근의 너무 사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 어느 하나를 가지고 는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이 두 학문을 연결시킬 수 있는 다른 무엇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다른 무엇으로서 심리학을 택하게 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그는 처음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하여, 1920년에 [정신분석학과 아동심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 다음 해에 프랑스의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논리학, 인식학, 철학, 그리 고 이상심리학 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파리에 있는 Simon과 함께 지능문제에 관해서 연구하게 되었는데, 연구과제는 표준화 추리검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표준화 추리검사는 모든 아동에게 동일한 문항을 주어 모든 아동이 이 에 반응하도록 요구된 검사이다. 여기에서 그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아동의 오답이 연령에 따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일한 연령의 아동은 비슷하게 틀린 답을 하고 또 아동의 대답 유형도 연령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나이 든 아동이 어린 아동보다 단지 영리한 것이 아니라, 이들 사고의 질이 서로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아동의 지능문제가 아동의 사고구조를 규명하는 방향으로 연구되어져야 하며, 지능 연구의 방법으로서는 표준화 검사방법은 부적당하며 비구 조화된 임상적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 후, 30여 년 동안 그는 임상학 연구방법을 사용해서 아동의 인지과정을 이해하는 일에 몰입하다가 1980년 9월에 작고했다. 독창적이면서도 놀랄 만한 그의 이론들이 미국에서는 계속 간과되어 오 다가 1930년경에 한 차례 돌풍을 일으키곤 곧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1955년경에 다시 그의 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현재 는 많은 연구의 이론적인 기초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유아교육의 이론 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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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나에게 음악적 이론이란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들에 의해 지배당한다.” 한 때 그 자신의 음악적 배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프로코피에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작곡가들 즉 모짜르트(Mozart)의 단순성,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서정성, 드뷔시(Debussy)의 인상적인 음색의 표현, 스크리아빈(Scriabin)의 원시적인 리듬, 바그너(Wagner)의 반음계주의를 흡수하고 나서 프로코피에프의 독창적인 음악이 탄생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기악곡의 가장 고전적인 스타일중 하나인 소나타 형식 안에서 20 세기의 작곡자답게 특징적인 그의 음악적 언어들을 사용했다. 8번 소나타의 예외적으로 느린 1악장을 제외하면 앞의 두 소나타는 1악장이 빠른 알레그로이다. 특징적인 것은 6, 8번 소나타의 1 악장의 주제들이 마지막 악장에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주었다는 점이다. 화성은 기본적으로 장, 단 3화음을 토대로 사용 하지만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2, 4, 7도와 특히 증6도 음정이 첨가된 화음과 이끈음 위에서의 장, 단 3 화음과 복조성을 사용하고 비화성음을 사용하여 불협화음을 이끌어 냈으며 인상적인 전개를 이루기 위해 병행화음을 사용했다. 음계는 모든 형태의 장, 단음계, 반음계, 특히 중세시대의 프리지안, 도리안, 로크리안 선법들이 차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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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1483.4.6~1520.4.6] 이탈리아 화가·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거장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행복하고 세련된 엘리트 예술가로서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 생애와 회화작품 (1) 수업기 그림3 1502~3 로마 바티칸宮 회화관 소장 그림 1500~1 브레샤 토지오 마르티넨고 미술관 소장 1483년 우르비노에서 화가·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수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고 같은 고향 화가 T. 비테에게 사사했다. 99년 전후에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공방(工房)에 입문하여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쾌하고 감미로운 전(前)고전적 양식을 급속하게 흡수하였다. 1500년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장식에서는 스승의 조수로서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최초의 대작인 《성모대관》 《마리아의 결혼》에서는 페루지노 양식에 완벽하게 동화(同化)되었음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독자적인 음악적 선(線)의 리듬과 경쾌하고 우아한 감각이 나타난다. 이러한 천성적인 회화 자질은 이 시기의 《삼미신》《기사의 꿈》《성 게오르기우스》 등의 소품에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림 5 1504~5 샹티이 콩데 미술관 소장 그림 4 1504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2) 피렌체시절 1504년 가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F. 바르톨로메오·미켈란젤로 등의 피렌체파(派) 예술을 왕성하게 연구하고 종래의 지방적 양식을 한층 새롭게 하였다. 특히 《성 안나》를 발표하여 화제를 일으켰으며, 레오나르도의 군상구성(群像構成)과 영묘한 명암 표현을 흡수하여 풍부한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는 고전양식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대공(大公)의 성모》 《목장의 성모》 《아름다운 여의사》 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가족(聖家族) 그림, 초상화 《도니 부처(夫妻)》,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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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보타

그의 건축적 특성은 흔히 루이스 칸(Louis Kahn)이나 르 코르뷔제의 그것과 비교된다. 빛의 처리와 기하학의 추구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설득력이 있는 설명으로는 디자인과 그 디자인의 바탕을 이룬 이론적 해석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 같은 일치화 과정은 대개 드로잉을 통해 구현된다. 그는 드로잉에 대해 타고난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자신의 건축작업을 소개한 글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 󰡒나는 드로잉을 할 때 연필이 내 작품 속에 숨어있는 아이디어와 느낌, 그리고 메시지를 적절하게 조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표현하는 가장 빠른 길을 발견하곤 한다. 또한 건축적 아이디어에 대한 해석과 연구과정은 드로잉을 말로써 표현하려고 할 때보다 제도판 위에서 연필의 움직임을 조사할 때 훨씬 쉽고 자연스럽다.󰡓 드로잉을 통한 그의 작품생성 과정은 건축가들을 다루고 있는 여러 종류의 잡지나 작품집의 마리오 보타 부분에는 유난히 드로잉이 많이 담겨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초기작품인 티치노의 리바 산 비탈레(Riva San Vitale) 주택의 경우에도 개념도를 먼저 그린 후 이를 기초로 실제적 건축작업을 이어갔는데, 그 지역의 물리적 환경해석에서 우러난 3차원적 형태의 골조를 우선적으로 드로잉한 후 이를 그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친 재료로 마감함으로써 건축으로 변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 결과가 자연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값싼 낭만주의적인 것도 아닌 지역 고유의 토착성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균형적인 선택󰡓이 그의 작품성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마리오 보타는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였으며 로버트 스턴, 마이클 그레이브, 필립존슨, 벤추리와 같은 미국 건축가들, 그리고 알도 로시, 로버트 크리거, 제임스 스털링과 같은 유럽 건축가들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널리 소개하고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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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Verdi)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파르마 현 브세토 근교 론콜레(Roncole)라는 농촌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88세로 세 상을 떠난 이탈리아가 낳은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베르디'가 태어난 1813년은 바그너가 태어난 해이기도 한데, 이들 둘은 전 유럽을 휩쓴 오페라 작곡가이지만 그 음악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달라서 철학적 또 는 사상적 배경이 없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작품을 썼다. 부자상인 바렛찌의 도움으로 부쎄토와 밀라노에서 기본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음악원 낙방 후 파이지엘로의 제자인 라비냐에게서 개인수업을 받았다. 1836년 부쎄토 시립오케스트라와 음악학교의 지휘가가 됨. 같은 해 후원자 바렛찌의 딸과 결혼. 주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 그의 교회관련적 음악들은 오페라가 갖는 극적인 요소들을 포용. 미사, 작은 합창곡등도 남김. 1839년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오베르토」를 밀라노에서 상연하여 성공을 거둠. 하지만 불행한 사건들(부인과 아이의 사망) 속에서 쓰여진 부파소재의 두 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1840)는 실패했다.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나부코」(1842)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의 심각하고 극적인 양식은 이후 베르디 작곡방식의 모델로 정착한다. 또한 이 작품의 애국적인 소재는 한동안 지속되어 10여 개가 넘는 작품들에서 계속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베르디는 문학적 소재에도 관심을 가져 「멕베드」, 「루이자 밀러」 등을 작곡한다. 「루이자 밀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오페라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나 그의 드라마 발전과정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르디는 1849년부터 부쎄토 근교에 산타가타 농장을 구입하여 여가수 스트렙포니와 함께 생활한다(결혼 1859).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50년대에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오페라를 통해 절정에 도달한다: 「리골렛토」(성격극), 「일 트로바토레」(성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성격극과 성악오페라의 합성). 원래 1858년 나폴리를 위해서 쓰여졌으나 검열을 피해 1859년 로마에서 상연된 「가면무도회」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긴 시간 간격들을 두고 세익스피어의「멕베드」제2판과 쉴러의 「돈 카를로스」 등이 쓰여졌다. 이들 작품에서 실험적으로 준비되던 것들은 1870년 수에즈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진 「아이다」에서 결정체로 나타난다. 지금도 이 오페라는 창의력, 구성, 음악적 긴장, 형식을 가장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1873년에는 「현악4중주 e단조」가, 그리고 1873/74년에는 소설가 만죠니의 추모를 위해 「레퀴엠」이 작곡된다. 이 레퀴엠의 초연 이후 오랫동안 베르디의 작곡활동은 중단된다. 1879년이 되어서야 베르디는 보이토의 권고로 다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하여 「오텔로」를 작곡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에는 서정코믹작품인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1893)를 작곡한다. 아내의 죽음(1897)을 전후에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테데움」과 「스타바트 마테르」도 쓰여진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음악인들의 양로원인 '휴식의 집'을 설립하고,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그 기금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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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그 뒤 모스크바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이 되었으나(1866~78), 77년 이전부터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1831~94)으로부터 연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교직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93년 10월에는 제6교향곡을 완성초연하였는데, 그날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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