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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헨델,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Georg Friderich Handel (1685 ~ 1759 / 독일) 중부 독일 할레(Halle)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세상을 떠난 `헨델`은 바흐와 더불어 바로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이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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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ff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chmaninov)는 20세기 초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고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이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노브고라드(novgorod)의 일멘 호수 근처에 위치한 할아버지 소유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서깊은 러시아 군인 귀족으로, 아버지는 퇴역 육군장교였고,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군인이었으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꽤나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가 6살 때부터는 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니스트를 가정교사로 초빙하였다. 하지만 1877년 러시아에 사회 격변기가 닥치게 되고,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어린나이에 가문의 몰락을 경험한다. 1882년 9세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 때문에 식구들은 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 때 라흐마니노프는 가정교사의 추천으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페테르부르크에는 디프테리아가 퍼져 누나를 잃게 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의견다툼으로 집을 나가고 만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다시 라흐마니노프의 가족들은 노브고라드로 돌아가게 된다. 노브고라드에서 생활했던 3년동안, 소년이었던 라흐마니노프는 유희를 즐기기에 바빴고, 그의 음악적 재능이 소진될까 염려했던 어머니는 마침 리스트에게 배우고 돌아왔던 사촌형 알렉산드르 실로티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니콜라이 츠베레프에게 보내라고 제안하고 그렇게 집안의 전통을 따라 장교가 되어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운명은 음악가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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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미하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은 19세기가 끝나 가던 1895년 11월 오룔(Oryol)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제문제》를 발표하면서부터였지만 실제로는 스탈린 시대가 끝난 후인 1963년에 개작되어 나온《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이 시기에 바흐친의 이론이 러시아 안에서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바흐친은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경우 민속 이론가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 혹은 소설 이론가 정도로, 그리고 그것마저도 지극히 부분적으로밖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정은 전혀 달라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바흐친은 20세기를 통해 인문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 사상가 그리고 20세기를 통한 가장 위대한 문학 이론가“ 혹은 ”20세기 대표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바흐친은 가히 이라고 할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은 지식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단순히 그가 말하는 을 정립한 문학 이론가에 그치지 않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이론은 지금도 페니미즘, 문화이론, 영화 이론 등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계속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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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르네 데카르트는 156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629년부터 20년간 네덜란드에 은둔하면서 수학과 철학, 과하게 대한 연구를 했다. 그 중 해석 기하학으로 알려진 수학의 분야를 창안하고, 과 을 출판했다. 쉰세 살 때 스톡홀름으로 가서 여왕의 철학 교사가 되었으나 폐렴에 걸려 1650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지식을 얻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믿을 만한 방법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으로부터 발생한 이러한 회의주의는 데카르트 시대의 지적 풍토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조류였으며, 과학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조류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거의 모든 중요한 제도가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시의 제도들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 권위가 일차적 연구나 탐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데카르트는 처음부터 확실성과 진리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확실성은 마음의 상태인 반면, 진리는 일상적으로 사물들이 그 바깥의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에 관련된 진술들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오직 확실성이라는 기반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진리를 확보할 수 있고, 따라서 진리에 대한 추구는 확실성에 대한 추구를 포함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연구에 해한 일련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진리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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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1820(순조 20)~1898(광무 2).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 이구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이다. 헌종 9년(1843)에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 천장 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 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하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동안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까지 불리며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철종이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를 포섭하고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내락 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그리하여 집권 후 김병기 등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과 선파인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를 배속시켰다. 그리고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다. 이것은 서원이 많은 폐단을 자아내었기 때문이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포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여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의 군국사무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과 같이 삼정문란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를 복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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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한서(翰西)남궁 억(南宮 檍,1863-1939)은 한말에서 일제 치하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다. 한서가 생존하였던 시대(1863년:철종 14년-1939년:인제 치하)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말 이후 노정된 양반 정치의 파탄과 민중의 반발, 서세동점에 대한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서구 열강의 침투와 일제의 침략 등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내적, 외적 도전에 대해 우리는 미처 응진 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대를 통하여 수구가와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고 새로운 세계사적 동향에 눈을 뜬 많은 우국지사와 선각자들이 사회 각분야에 걸쳐 애국계몽운동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특히 교육에 있어서는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과 더불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몸소 실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한서 남궁 억의 자(字)는 치만(致萬), 이름은 억 (檍), 호는 한서(翰西), 본관은 함열이다. 1863년 12월 27일 서울 왜송동에서 철종 때 중추도사를 지냈던 아버지 남궁 영(南宮 泳)과 어머니 덕수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명문에서 태어난 한서는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홀어머니의 바느질품으로 근근하게 꾸려 나가는 가정 형편으로는 서당에 다니기도 어려웠으나, 다행이 이웃에 사는 이사과(李司果)댁 사숫에 다니는 것을 허락 받아 사서삼경 등 한문을 공부하여 정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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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고 송나라에서 태어났으며 대략 기원전 370년이나 369년에 태어나 300년이나 280년 사이에 죽었다고 한다. 그 중에 369~286년을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한다. 결국 장자는 제나라가 송나라을 멸망시킨 해가 286년인데 이를 보지 못한 것 같다. 태어난 곳은 몽(蒙)으로 지금의 하남성 귀덕부 상구현 부근이라 하며 그 곳에서 칠원리 (漆園吏--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를 지냈고 집안이 가난하여 하천 관리인에게 식량을 얻으러 갔다고 한다. 그의 조국인 송은 약소국으로 주변국가에게 침략을 당했으며 상황은 가혹하고 불안과 부자유 그리고 어두은 현실 뿐이었다. 장자의 생계수단이 칠원리인 것을 보면 소생산자였고 평민계층이었다.(하층의 지식인) 사상의 발생은 관리인으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 유람, 관찰, 상상의 기회를 가졌고 대자연과 다방면의 하층 노동자들과 접한 것이 장자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본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초(楚)의 위왕(威王)이 장자의 소식을 듣고 초빙하였으나 그는 `돌아가시오. 나를 모독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도랑 안에서 혼자 즐기며 놀지 나라를 가진 자에 의해서 얽매이지 않고 종신토록 일을 맡지 않음으로써 내 뜻을 즐겁게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자의 철학은 묵자와 같이 소생산자의 사상적인 정서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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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부모로부터 음악적 지식을 전혀 물려받지 않은 가운데서 출발하였다. 1738년 봄 하인부르크의 학교장과 교회의 합창장으로 있던 이모부 J.F.프랑크에게 맡겨져 초등교육과 음악교육을 받았다. 1739년 빈의 성 스테판교회의 합창장에게 발탁되어 이듬해부터 교회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합창단원으로 생활하며 일반교양과 음악의 기초를 몸에 익혔다. 변성기가 되기까지 그는 독창자로서 주로 활동하였고, 1745년 동생 미하엘도 합창단원에 들어와 같이 생활하였는데 하이든이 변성기로 활동을 못하자 그를 대신하여 독창자로 활동하였다. 1749년 무렵에 변성기로 인하여 카펠하우스(기숙사)를 떠나 10년간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고 단편적인 일화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생계를 위해 여러일을 하던 시기 반주자로 활동하며 작곡을 공부하고 상류계급의 후원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시기 젊은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던 시기로 추측될 뿐이다. 이후 사교계의 화려한 존재였던 툰 백작부인의 음악교사를 시작으로 25세 무렵에는 퓌른베르크 남작의 와인칠의 성(城)으로 초빙되어 최초의 현악4중주곡을 작곡하였고, 27세 무렵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가의 악장이 되어 초기의 일련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하이든의 음악활동을 결정지은 것은 1761년 헝가리 대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가(家) 부악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72세까지 42년간에 걸쳐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최초의 5년간의 부악장 시절은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성에서 세속음악을 담당하였고, 교향곡에 관해서는 바로크로부터 전 고전파에 이르는 여러 양식을 시도하면서 독자적 교향곡 양식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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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B.C. 569년경 사모스 섬에서 출생했다. 그는 젊었을 때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당시의 선진국에서 수학을 공부한 후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에는 귀족의 자제가 많았는데, 그들은 별 모양의 오각형 휘장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누구나 그들이 `피타고라스 학교`의 학생인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학교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연구한 것은 일체 밖에다 발설할 수 없도록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발견한 것은 모두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 발표해야 했다. 그들은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여러 가지 규율 아래 절제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규율 중에는 콩을 먹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이는 그들이 숫자를 표시할 때 모양으로 나타냈다. 피타고라스 학교 학생들은 졸업한 후에도 학교의 휘장을 달고 다닐 만큼 결속력이 강했으며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마침내는 하나의 비밀 결사 단체가 되었다. 세력이 커진 이들은 결국 정치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데, 귀족의 자제가 대다수였으므로 나라의 정치가 점점 귀족 중심이 되어 갔다. 그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반대파들은 위협을 느껴 피타고라스를 붙잡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져 그후 수백 년간이나 피타고라스학파로 남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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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1844년 : 10월 15일. 독일의 작센 주 뤼첸 근교 레켄 마을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49년 : 부친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8년 : 나움부르크 근교의 슐포르터 고등학교 재학 1861년 : 의 피아노 발췌곡이 발표되어 바그너를 알게 된 이 무렵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휠덜린 등을 애독 1864년 : 슐포르터 졸업. 10월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년 : 10월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김. 쇼펜하우워 철학을 알게 되어 탐독 1867년 : 나움부르크 야전포병대 기병대대에 입대 1868년 : 10월 제대. 대학에 복학. 11월 8일 라이프찌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됨 1869년 :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원외교수로 강의 1870년 :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됨 1872년 : 출판 1873년 : 두통으로 시달림. 제 1편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 라우스) 출판. 단편 이 쓰여지다. 1874년 : 제 2편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와 제3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워) 출판 1876년 : 제 4편(바이로이트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 출판. 병이 악화 되어 10월 대학을 휴직 1878년 : 출판 1879년 : 중병. 바젤대학 교직 사임 1880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2부 하권에 해당하는 출판 1881년: 출판 1882년: 집필, 루 살로메와 교제 1883년: 제 1. 2 부 집필, 출판 1884년: 제 3 부 집필, 출판 1885년: 제 4 부 완성, 자비 출판 1886년: 자비 출판 1887년: 출판 1888년: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코펜대학에서 니체에 대해 강의 출판, 완성, 집필, 완성. 연말부터 정신착락의 증후가 나타남 1889년: 1월.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 1897년: 어머니 사망. 누이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56세로 사망. 고향인 뢰켄에 안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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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河崙)

하륜(河崙)은 경상도 진주 사람으로, 순흥 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 과거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1388년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에 반대하여 양주(襄州)로 추방되었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1393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된다. 그 후 태종의 측근으로 영의정의 벼슬까지 지내다가 1416년 공무 수행 중 함경도 정평에서 사망한다. 그는 직업적 술사는 아니었지만 조선 풍수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태조 이성계에게 왕사의 자격으로 자문역을 하였던 무학이 있었다면, 태조의 아들 태종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무학과 하륜은 동시대인이었다. 무학이 중으로서 왕사의 지위까지 올랐다면 하륜은 유자(儒者)로서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 둘 모두 초기 도읍지 및 왕릉 선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풍수 실력을 발휘하였다. 흔히 신라 말 도선 국사와 조선의 무학대사가 한반도의 최고 풍수로 알려져 있고 실제 그들에 관련된 숱한 전설과 민담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무학의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왕조실록에서는 지극히 간단하게 다루어 무학의 풍수지리 면모를 제대로 살필 수 없다. 반면 동시대인 하륜의 풍수지리는 왕조실록을 통해서 어느 정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연유는 하륜 자신이 이조의 개국 공신으로서 그리고 태조의 후계를 둘러싼 권력 다툼에서 태종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실세였기 때문에 왕조실록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자세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공무 중 사망하였다. 함흥 일대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조상 능을 살피러 갔다가 발병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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