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내 검색

서재필의출생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송재이고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1864년 1월 7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부친 서광효와 모친 성주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고 충남 논산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의 칠촌 아저씨 서광하에게 아들이 없어 그곳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의 양모는 한 때 세도가 안동김씨의 집안이었다. 일곱 살 무렵에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판서직에 있던 외삼촌인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세가 되던 1882년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 번째로 합격하여 개화파 우두머리 격인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김옥균, 서광범은 서재필의 친인척 관계로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이들과 지내면서 개화에 관한 지식과 국제 정세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아 갔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육군학교에 유학을 하여 당시 일본의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도입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훈련을 공부하고 1884년 국내의 정치사정과 정부의 재정상의 이유로 귀국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 고종의 승낙을 받고, 조련국의 사관장이 되었으나 임오군란이후 청의 세력과 수구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이명직(李明稙)의 생애 (1890-1973)

이명직은 1890년(고종 27년) 12월 2일 서울 충정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이성태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이성태는 대궐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있었으나 생활은 어려웠다. 그는 구한말 차츰 무너져 내려 앉는 조정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결국은 한국의 사법권을 일본에 위탁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권 및 감옥사무의 처리권을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가 1909년에 체결되자, 관직의 뜻을 버리고 물러났다. 그는 아들 명직에게 정치에 입신하여 출세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명직은 입신양명이라는 목적에는 그의 부친과 뜻이 같았으나 그 방향은 달랐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도승이 되어 평생을 바칠 결실을 하였으나, 종교심성의 발휘는 불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종로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입학하면서부터인데, 성경과목에 흥미와 관심은 있었지만 개종하지는 않는다. 그 후 박감은과 결혼하고, 1909년에 일본 휴학길을 떠났다. “배워야겠다.”는 굳은 신념 아래 무단가출의 형태로 무작정 일본에 건너간 그는 거의 1년 동안은 방황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일이 일어났다. 박용규는 새 종교인 기독교로의 열정적인 추구를 가지게 된 이명직을 설명해주고 있다. '동경으로 건너간 이명직은 배워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일본에 건너왔으나, 어떤 학교를 정해야 하는지 몰랐다. 어느 날 동경를 걷다가 한 모퉁이에서 요란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거리에는 구세군 전도대가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거리 구경을 나온 터라 전도 강연을 다 들었다. 전도 강연을 다 들은 이명직은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받았다. 그 뒤 어느 날 저녁에 동경 Y.M.C.A 총무로 있는 김정식을 만나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는 기독교를 믿기로 하였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허균의 생애

허균은 양천 허씨로 1569년에 태어났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무렵에는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하며, 누이 난설헌과 함께 손곡 이달로부터 시를 배웠다. 1589년에 생원이 되었고, 159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병조좌랑을 거쳐 황해도 도사의 관직을 받았을 때, 서울의 기생들과 무뢰배들을 관아 별실에 드나들게 하는 등 방탕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에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불교를 믿는 등의 행각으로 계속해서 탄핵을 받고 파직되는 것을 반복하였는데, 세 번째인 삼척부사 자리에서 석 달만에 쫓겨날 때에는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대로 나의 삶을 이루겠노라.”라 하여 세상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가 어느 정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칠서지옥 이후에, 이이첨의 추천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1617년에는 인목대비의 폐위에 앞장서면서 대북파의 일원으로서 왕의 신임을 얻고, 좌참찬으로 승징하는 등 점차 그 지위가 굳어졌으나 하인준 등과 역모를 계획하다가 탄로나 가산이 몰수되고 처형당했다. 허균은 그 재능이 뛰어났으나 행실이 방탕하고 자유분방하였으며 당대의 유교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더욱이 마지막에는 역모죄로 처형당했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고 엇갈리는 데가 있다.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다”라고 하여 인륜도덕을 저버리고 모든 악을 한 몸에 구비했다는 원색적이기까지 한 비난과 비판에서부터 그의 재능의 빼어남 및 남다른 시재(詩材)를 칭찬한 것까지 다양하다. 보통 허균에 대한 평가는 그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행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경우가 전반적이다.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기록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종종 윤리를 벗어나고 있는데, 처음 벼슬에서 쫓겨날 때의 행각 이외에도 누이 난설헌의 시집을 만들 때 중국시인의 것들을 은근슬쩍 끌어와 집어넣었다던가 광해군 시절에 벼슬을 할 때 명나라에 가면서 교묘하게 공금을 옭아내어 만 권이 넘는 책을 사는데 썼다던가 등의 행적이 그러하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조선왕조 삼종의 혈맥 - 사도세자는 누구인가?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삼종의 혈맥(효종, 현종, 숙종)’을 잇는 원자가 축복 속에서 탄생했다. 생후 14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된 이 아이가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22대 임금이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17년 후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죽을 줄은 더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손 귀한 왕의 핏줄인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리고 비행을 했다는 이유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며, ‘패자의 기록’은 비참하리만큼 왜곡됐거나 남아 있지 않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붕당정치와 관련이 깊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성장해감에 따라 자신들의 세력에 포섭하려 하였다. 영조도 노론이었고,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도 남편을 따라 노론을 택했으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도 노론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 쪽으로 기울며 고립되기 시작했다. 효종을 닮아 북벌을 꿈꾸고 문과 무를 겸비한 사도세자와 현상유지가 최선인 노론과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인 것이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광해군!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어려서부터 뛰어난 왕재로 주변의 신망 을 받아왔지만 광해군이 세자의 위에 오 른 것은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사정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운이었다. 전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선조의 적통승 계 주장에 밀려 자신의 왕재가 오히려 목 숨을 위협하는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 사건은 1591년 자신을 세자로 추 대한 정철에 의해 제기된 건저의 사건인 데, 선조가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신성군을 지지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입지가 상당 히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아가 아 버지인 선조가 아들 광해군을 왕권위협세 력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광해군 은 결코 순탄하지 못한 청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신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광해군이 선조의 현실적 판단에 따라 급작스레 세자에 책봉되게 되었고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끝까지 적통왕자를 생산해내지 못함에 따라 세자의 위는 그대로 굳어지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란중인 1594년 선조가 세자책봉을 명에 주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보낸 윤근수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임에 실패하자 광해군의 입지는 다시 흔들렸고 선조가 말년에 새장가를 들어 인목왕후와의 사이에서 그토록 소원하던 적통왕자인 영창대군을 얻자 정세는 급변하여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백지화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당시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탁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심중에 부합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손을 잡고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여기에는 정철의 실각이후 정권의 소수파로 전락했던 서인세력의 암묵적 동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황진이

조선시대 기생이라 하면 노비와 비슷한 천한 계급의 하나로 지체 높은 남성들의 곁을 지키는 노리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기녀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신분이 높은 양반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멋과 재주를 키우며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천인이라도 노비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춘향이는 퇴기의 딸로 갖은 수난을 겪은 끝에 정경부인으로 신분 상승이 되는 경우도 있고, 그보다 못하다 하더라도 간혹은 양반 사대부의 측실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일반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누렸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과 더불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남기고 후대인의 기억 속에 오래 기억되는 기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뛰어나지 못한 기녀들은 일반 천민들과 더불어 살다간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나라 사람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위주의 사회이다 보니 여성이 문학을 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제가의 성씨나 역대 국호나 성현들의 명자 정도나 글을 익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기녀들이 설 자리는 매우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기녀는 양반 사회의 주변에 머물며 문장과 음악에 능했던 여성 집단이라는 것에 집중해보면 글을 배우고 문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사대부의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억눌려 있던 전통사회에서 기녀는 당대 상류층 남성과 교류를 위해서라도 지적능력을 갖추었어야 했을 것이다. 문장과 음악에 능한 기녀들은 문학의 장르에서도 남다른 면을 볼 수가 있다. 여성들이 글을 익히고 문학적인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시문을 짓는 정도가 거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조의 경우는 다르다. 일반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은 한시문을 지었어도 시조를 지은 것을 볼 수 없다. 우선 시조는 대부분의 경우 창(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부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부르든 대부분이 공개된 잘에서 목청을 돋우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경우 직접적으로 창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시조의 창작의 기회가 적었을 것이다. 물론 기녀라고 해서 모두가 시조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일지라도 분명 시조를 가까이 두고 즐겼을 기녀들이 꽤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기록으로 남겨져 전해지는 시조가 거의 없을 뿐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한 기녀가 있었으니 기명은 명월(明月)이라하고 이름은 황진이이다. 그녀의 시조는 6수나 그 일화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현대 심리학의 위대한 혁신자로써 물리학계의 아이슈타인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는 이드, 자아, 초자아, 불안 등 심리학적의 많은 개념들을 정립했으며 이러한 심리학적 개념들을 여러 분야의 연구에 적용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는 집단 노이로제”라 말하면서 사람들이 죄의식이나 상처를 타협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에서 죄의식이란 초자아(super ego)와 자아(ego)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타협한다는 것은 방어기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죄의식, 초자아, 자아, 방어기재, 무의식 등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볼 것이며 프로이트가 종교에 관해 쓴 논문들을 참고하여 프로이트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 자세하게 알아볼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성이 세 가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가 이 세 가지 체계로서 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정신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드의 기본적인 기능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높은 긴장상태가 지속될 때 긴장상태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이드는 가장 초보적 형태인 반사작용을 통해 긴장상태를 낮추는데 이러한 반사작용에는 긴장을 낮추는 데에 있어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배고플 때 단순히 위가 수축하는 작용(반사작용)만 해서는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긴장을 효과적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이드 이외에 무언가가 필요한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자아이다. 자아는 이드와 달리 현실원리에 의해 지배되는데 현실원리도 결국 긴장은 낮추는 것이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긴장을 낮추는 과정에서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쳐서 쾌락원리를 일시적으로 유보하는 것이다. 현실원리가 작용하면 사람들은 지각, 기억, 사고, 행동 이라는 심리적 과정이 자극되어 그것들이 성장하고 정교해진다. 초자아는 인성의 도덕적, 비판적 측면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이드, 자아와는 달리 현실이나 쾌락보다는 완전성을 추구한다. 초자아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선, 악, 덕, 죄에 대한 인식을 수용함으로서 형성되는데 부모가 아이가 잘하면 칭찬을 하고 아이가 잘못하면 벌을 주듯이, 초자아는 자아에게 보상과 처벌을 가함으로서 규율을 강요한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동쪽의 '마른내길' 근방이며, 그가 탄생한 집터는 현재의 인현동 1가 40번지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1대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11대손 정(貞)이며 평민생활을 하는 양반이었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였다. 어머니 변씨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면서도 가정교육에 엄격하였다. 조선왕조로 넘어오자 7대손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내는 등, 그의 가계는 주로 문관 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그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은 정치적 혼란기에 벼슬을 사양하고 조광조(趙光祖) 등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변을 겪게 된다. 그후 아버지 정(貞)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냈으니 가세 또한 기울어 있었다. 이순신은 희신(羲臣), 요신(堯臣)을 두 형으로 두고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밑으로는 아우 우신(禹臣)이 있었다. 큰형 희신에는 네 조카 뇌(雷), 분(芬), 번(蕃) 그리고 완(莞)이 있었고, 작은형 요신에게는 두 조카 봉과 해가 있었으나, 두 형이 모두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들 여섯 조카를 돌보아야 했다. 그는 조카들에게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였다고 한다. 이순신과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는 세 형제 회, 열, 면과 한 딸을 두었고, 서자(庶子)로는 두 형제 훈(薰)과 신(藎)은 무과에 올랐다. 부인 방씨(方氏)는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데, 이순신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올랐고, 80이 넘도록 살았다. 무과제 이후의 관직 생활 22세에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던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말을 달리다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하였다. 32세 되던 1576년(선조 9) 봄에 식년무과(式年武科) 출장하여 병과(丙科) 제4인으로 급제하였다. 등과 하고도 그해 12월에야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 35세 되던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36세가 되던 1580년 (선조 13) 7월에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었다. 이 무렵에 좌수사 성박(成 )이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 물건을 함부로 베어 갈 수 없다 하여 사람을 돌려보내니 수사가 크게 호통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원효의 사상

원효는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임이 거의 확실한 것이 80여부 150여 권에 달하며, 『송고승전』의 찬녕이 “문단을 휘어잡았다.”라고 찬탄할 정도로 개개의 저술들이 유려한 문체로 심원한 불교철학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유감스럽게도 원효의 저술 대부분이 산실되었다. 그나마 온전히 전하는 것은 14부 17권에 불과하고 부분적이나마 전하는 것이 10부 안팎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원효의 저술목록은 앞으로 새로운 저술이 발굴되거나 원효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계속 수정, 보완될 여지가 남아있다. 특히, 그의 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愛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인물 > 국가별/시대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