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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플라톤( Platon : B.C. 427-347)은 아테네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여러 제자들 중 가장 영특하고 글재주가 탁월했던 제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호머(Homer)와 같은 위대한 서사 시인이 되거나 페리클레스(Pericles)와 같은 위대한 정치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꿈은 소크라테스를 만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충격을 받고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즉,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플라톤 삶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추종자였다. 그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특히 신에게 감사드린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스승을 얼마나 앙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상당히 많은 대화편들은 써냈는데, 대부분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과 죽음을 묘사해 낸 것들이다. 예컨대, 그의 초기 저작으로 , 제1권 등이 있으며, 중기에 저술된 것으로는 ,, 제 2~10권, ,, 등이 있다. 후기 저작으로는 , ,,, 등이 있다. 플라톤을 이들 저작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철학적 대화를 전개하였다.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아니면 플라톤에 의해 그려진 가공의 인물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철학사에서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적 문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역사적으로 실존했었는지, 아니면 플라톤에게 의해서 그려진 가공의 인물인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한 줄의 글도 한 편의 책도 써낸 적이 없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독특하고 수려한 문체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과 죽음을 묘사했으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자신의 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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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를 모르는 중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네델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화가 신인상주의와 같은 시대에 인상주의의 맥락에서 좀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지향한 또 하나의 경향으로 세잔느, 고갱,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의 3대 화가라고 부른다. 고갱과 세잔느가 인상주의 그룹전에 여러 번 출품하면서 그들 화업의 출발을 인상주의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을 인상주의의 후계자로서, 그러나 새로운 인상주의자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인 외관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표현을 하였다면 이들은 보다 견고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며, 이로써 인상주의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업적, 즉 순수한 빛과 색을 새롭게 발견하고 각자의 개성 있는 화풍을 인정하는 전통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인상주의가 잃었던 견고함, 질서,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오한 깊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 화가의 접근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세 사람의 업적이 모두 20세기 미술-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이 발생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1890년 그가 권총 자살을 하기 3개월 전에 그린 그의 자화상, 이 그림에서 고흐는 그가 좋아하는 노란색을 조금도 쓰지 않았다. 죽음에 임박해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듯이 차가운 청색과 회색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눈은 냉철하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꿈틀거리는 붓자국으로 이루어진 배경과 옷은 혼의 움직임처럼 불안하다. 그러나 그는 그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꾹 다문 입과 뒤로 빗어 넘긴 머리를 한 자신을 들여본다. 그는 이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세속적으로 실패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외모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영혼을 그려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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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조선 화단의 거장으로 우리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남긴 장승업은 조선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태원(太原)이고 호는 오원(吾園)이다. 주요작품으로는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등이 있다. 장승업은 1843년 중인가문으로 생각되는 대원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이응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응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이상적의 사위이며, 중국 청나라를 왕래하던 역관으로서 그림을 좋아하여 많은 그림을 수집하였다. 장승업은 그림이 가득 찬 이응헌의 집에서 어깨 너머로 화가나 수장가들의 그림 감상을 눈여겨보다 어느 날 우연히 붓으로 흉내를 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저절로 그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승업의 그림에 대한 재능은 주인 이응헌의 눈에 띄었고, 그로부터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에 전념한 장승업은 놀라운 기량과 넘치는 신운, 그리고 왕성한 창작력 때문에 금새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장승업은 마치 전생에 화가였던 듯 샘솟듯 넘쳐나는 영감을 기운 넘치는 필력으로 쏟아내었으며 당시 화단의 총아(寵兒)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궁중에까지 알려져 고종의 어명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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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피에리(Alvaro Pierri)

알바로 피에리, Alvaro Pierri 1953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출생, 현재 오스트리아 반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알바로 피에리는 매혹적인 음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연주자로서 그의 예술 세계는 지속으로, 그리고 지금도 클래식 기타의 세계를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전체를 꿰뚫는 해석, 숨 막히는 프레이징과 지필 줄 모르는 연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향한 음색의 스펙트럼 등은 알바로 피에리의 공연을 잊을 수 없는 경험의 장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알바로 피에리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음악가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숙모에게서는 기타를 배웠다.(그의 숙모인 Olga Pierri 역시 유명한 기타리스트이다.) 깔레바로 교본으로 유명한 남미의 거장 아벨 깔레바로, 귀도 산토르솔라에게서 정식으로 사사 받은 후 11살 때부터 아르헨티나 부에 노스아이레스 국제기타콩쿠르에서 1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국제기타콩쿠르에서 1위, 파리 기타 국제 콩쿠르(18회, 1976년)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단연 돋보이는 입상 경력을 쌓았다. 피에리의 미국 데뷔는 뉴욕에서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이루어졌다.(“우연히 만나게 되는 재능이 아닌, 예술적 성숙도를 확실히 보여주어JT다.” - 뉴욕 타임즈 리뷰). 이어 1983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현악연주자들과 함께 독일 무대에 데뷔했으며, 그 후 독일, 스페인, 프랑스, 캐나다, 일본을 비롯, 전 세계 TV,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청을 받아 출연했다. 또한 피에리는 대중과 비평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고 있는 음악가로서 유럽, 미국, 아시아의 주요 콘서트 하우스가 초대하는 정기적인 게스트이기도 하다. 레오 브라우어, 귀도 산토르솔라, 아스트로 피아졸라, 아벨 깔레바로, 까를로 도메니코니 같은 현대 작곡가들은 피에리를 위한 작품을 썼으며, 초연은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외에도 실내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는 그는 피아졸라, 프랑크 페터 침머만, 레오 브라우어,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 및 케루비니 콰르텟, 샤를 뒤트와 등과 함께 다양한 음악 활동을 별여왔다. 솔로, 실내악, 협주곡 등 피에리의 연주 음반은 Metropole-Polydor(프랑스), Bule Angel-2001(독일), Milan Records und Analekta (캐나다)and HOMA(일본)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국내에는 ANALEKTA 레이블 음반 소량 수입) 최근 유니버설은 알바로 페이리, 피아졸라, WDR오케스트라가 연주된 DVD를 발매했다. 교수 활동으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브라질 산타 마리아 대학을 거쳐 몬트리올에서 수업을 맡고 있으며, 2002년 봄에는 빈 국립음대에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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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72) 고전주의 작곡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 성격으로 보아 낭만주의로 간주되고 있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인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같은 거성으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고통을 받았으며, 아버지의 무능력으로 인해 가족을 도맡아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본궁정에서 그는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및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으면서 관직을 얻었고, 이곳에서 1792년까지 머물렀으며, 그후 비엔나로 옮겨가 여생을 보냈다. 그가 비엔나에서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점차 청각에 장애가 일어났으며 결국 연주 생활을 못하기에 이르렀다. 베토벤은 음악 사상 처음으로 귀족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작곡 생활을 하였고, 그의 음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일생은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첫 시기는 1802년으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로서의 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지은 곡은 낭만주의 특성이 엿보이긴 하나, 모차르트나 하이든 등의 고전주의적 전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둘째는 1814년까지의 시기로 완전히 낭만주의적 특성이 엿보이는 작곡을 하였다. 마지막은 말년까지시기로 이때에는 좀더 관찰적이고, 영적이며 또한 즉흥적인 풍을 보여주고 있는데 심지어는 바로크시대의 대위법 형식을 연상케 하는 곡도 있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의 규제 및 억제에서 벗어나,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감정을 음악에 부여한 장본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에 기여한 공헌이 지대하였고, 따라서 그의 작품은 그 당시 후배들에게 표본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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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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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정도전(鄭道傳)은 1342년,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한 스는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밑에서 수학했는데,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당시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주위의 주목을 바았고, 특히 유교 경전과 성리학에 능통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 데다 날카롭고 불같은 일면이 있어 항상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웠는데, 그는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평생을 투지와 용기로 일관하며 살았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관철하는 강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스승이었지만 훗날 정치적으로 그와 날카롭게 대립한 이색도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정도전은 항상 할 일을 다하지 못함이 없고, 어떤 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하고 칭찬했다. 정도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36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75년에 명나라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하러 북원(北元)에서 사절이 오자, "공민왕(恭愍王)이 사남[明]정책을 펼쳤으니 사북[元]은 불가하다." 하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공민왕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뜻도 있지만, 원, 명 교체기(元明交替期)의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본 일면이 강하다. 정도전은 이때부터 10여 년 이상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삼각산 아래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에 겪었던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신의 호를 삼각산의 모양을 본떠 삼봉(三峰)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절치부심하던 정도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 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실세로 여겨지는 이성계(李成桂)의 밑으로 들어가서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암중모색의 세월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정도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384년에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절로 가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 갈 사람으로 정도전을 추천한 것이다.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정도전은 얼마 동안 성균관 재주로 있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남양 부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한다. 1388년에 드디어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기를 펼치게 된다. 일생일대의 최고 후원자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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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1899년 서울 야주개 (지금의 종로구 당주동)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였다. 출생에서 아홉 살 정도 까지는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도 부족하여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집을 만들어” 쓸 정도로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7세 때 천자문을 읽었고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유치부에 입학 9세 때 증조부의 사업실패로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고생을 하였다. 어느 날 총명한 방정환의 재능을 알아보고 어느 미술가가 양자로 들이려고 하였으나 외아들인 관계로 그렇게 못하자 환등기를 선물한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변사를 흉내를 내는 등 구변솜씨를 늘려나갔다. 16살이던 1914년 보통학교를 거처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기울어져가는 조국과 스스로의 장래를 생각하여 담임과 엄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졸업을 1년 앞두고 중퇴한다. 19살이 되던 해 천도교의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과 결혼했다. 1919년 21살의 방정환은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을 받다가 1주일만에 풀려났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란 표어를 걸고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조직화 체계화 시킨다. 본격적으로 일본유학을 떠나 아동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연말에는 안데르센 동화 그림동화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번안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였었다. 1922년 제 1회 어린이날을 제정 25살인 1923년 방정환이 심혈을 기울인 [어린이]가 창간되었다. 1931년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공부를 잘하라’는 말을, 친구들에게는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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