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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만(渤海灣)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 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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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수․당과의 전쟁

고대 사회의 국난극복 역할 중심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한 고구려는 수많은 외적의 침략속에서 고구려의 국가 보위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저지했다.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이 이를 잘 보여 준다.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협을 받던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연결하고, 남으로 백제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돌궐이 수에 의하여 멸망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수의 문제와 양제는 잇따라 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략해 왔다. 고구려는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양제의 침입 때에는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살수대첩에 대해 우리의 기록과 북한의 기록은 다르다.북한의 기록을 정리해 놓은 역사서에 따르면 살수는 평양성과 압록수 사이에 있었고 오골성(현재 수암) 동쪽, 평양성(봉황성)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었고, 수 나라 장수 운문술이 살수를 건널 때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일대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은 대양하의 지류인 소하자뿐이었던 것이다. 이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은 건국 초에는 우화정책을 취했으나 곧이어 동북 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왔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지방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재 정치를 단행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에 대하여 강경 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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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에 대한 평전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으로 자는 원정, 시호는 장헌이다. 태종의(이방원)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 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 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대리에 있는 영릉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69년(예종 1)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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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사상과 문학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이며, 호는 담헌(湛軒) ·홍지(弘之)이다. 그는 너댓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 소학, 사서 등의 책을 공부했다.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오르기 위해 공부하는 다른 양반들과는 달리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9세가 되던 1759년 나주 목사였던 아버지를 방문하여 기술자 나경적(羅景績)을 만나 혼천의와 자명종을 제작하기로 했고 3년이 지난 후엔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을 만들게 되었다. 1765년엔 그의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이 중국으로 가는 사신 중 한사람으로 서장관이 되자 홍대용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이 여행을 통하여 서양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사상을 접하면서 천문, 지리, 역사 등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과학 사상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1773년, 자연 철학과 과학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수학, 천문, 측량도구에 대한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과학사상을 정립하였다. 그 후, 1774년 44세 때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하기 시작 하게 되었다. 1780년(정조 4) 영주(榮州)군수가 되어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 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현감이 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공무의 안건도 복잡하기만 하여, 본래의 계획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내던 중 1783년 10월 22일 5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홍대용 선현의 생가 터(충청남도 문화재 제349호)가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646-1번지에 있다. 장산리에서 속창리로 통하는 병천 방향 도로변에는 홍대용 선현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101호)가 있으며, 천안 사거리 공원에는 홍대용 시비(詩碑)가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고, 편서(編書)에《건정필담(乾淨筆談)》,《주해수용(籌解需用)》,《담헌연기(湛軒燕記)》,《임하경론(林下經綸)》,《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삼경문변(三經問辨)》,《의산문답(醫山問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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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란?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禮曹)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 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周尺)으로 7치(14.7 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尺]로 측정한다. 즉, 대(臺)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監營)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瓷器) ·와기(瓦器)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하였다. 한국에서는 이미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였으며, 이것은 이탈리아보다도 약 200년이 빠르다. 금영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든 것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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