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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簡儀)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渾天儀: 천문시계)와 함께 조선의 천문대에 설치한 가장 중요한 관측기기이다.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1437년(세종 19)에 완성된 간의제도는 《원사(元史)》에 나타난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하여 대간의와 소간의를 만들었는데, 소간의는 대간의를 휴대용으로 축소해서 정동(精銅)으로 다리[趺]를 만들고, 그 둘레에 수거(水渠: 일종의 도랑)를 파서 자오(子午)에 준하여 수평을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적도환(赤道環)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七政: 일 ·월과 수 ·화 ·금 ·목 ·토의 5행성) 중 외관입수(外官入宿)의 도분(度分)을 재며, 12시(時) 100각(刻)으로 나눈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 안에 있는데, 그것으로 일구(日晷: 시각)를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을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1432년(세종 14) 장영실(蔣英實) 등은 목제간의를 만들었으며 1438년에는 구리로 대 ·소 간의를 만들어, 대간의는 경회루 북쪽에 있는 간의대에 설치하고, 소간의는 휴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간의는 조선의 천문학에서 적도(赤道)에 관한 위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든 것으로, 혼천의의 육합의(六合儀) ·삼진의(三辰儀) ·사유의(四游儀) 중에서 적도환 ·백각환 ·사유환만을 따로 떼어서 간소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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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한국의 모습

- 경복궁과 조선 총독부 : 조선 총독부(1926)는 경북구의 중심 가장 정면을 헐고 세움 - 영웅문과 독립문 : 영웅문은 중국에 사신을 맞이하는 건물, 독립문은 더 북쪽에 위치 - 남대문 : 조선시대는 대문을 통과하여 사람과 전차가 지나다녔다. - 숙적문, 돈의문, 충인지문, 숭례문이 있었음 - 종로 : 1890년대 전기를 사용한 곳 - 시장 :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예) 대구 약전 시장 - 옹기전 : 옹기가 없어진(아파트의 건설로 인한) 지금은 각 가정의 맛이 없어졌다. - 지게 : A-Frame의 기계로 외국에 소개, 우리나라만 존재 - 부채 - 전당포 :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은 일제시대에 생겨났다. 1897년 2월 19일 설립된 한성은행(조흥은행 전신), 한국에 근대적 은행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1878년이다. 1909년 중앙은행으로서 구(舊)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업무를 조선은행에 이관, 8 ·15광복과 더불어 한국은행으로 복귀하였다. 상업은행으로는 1897년에 설립된 민족계(民族系)의 한성은행(漢城銀行)이 효시이며, 이후 변천을 거쳐 현재는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 ·신한은행 ·한미은행 ·동화은행 ·하나은행 등의 전국은행과 부산은행 ·대구은행 ·경기은행 ·강원은행 ·충청은행 ·충북은행 ·전북은행 ·경남은행 ·제주은행 ·광주은행 등의 지방은행, 외국은행 국내지점이 일반 은행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수은행으로서는 1918년에 발족한 조선식산은행(산업은행의 전신)이 최초의 것인데, 현재는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 ·외환은행 ·장기신용은행 ·수출입은행 등이 각기 특수분야의 금융업을 수행하고 있다. - 주점 : 100년저과 지금 발음의 차이가 있다. 슈점에서 주점으로 - 식사 : 공동식사는 거의 없었다 즉 겸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상이 따로이 준비되어 있었다. - 우리나라를 모자의 나라라할 정도로 많았음 - 단발령 이후 갓, 비녀가 필요 없어졌다. - 인삼과 한지 : 세계적 품질의 우리나라 고유 생산품 - 벼농사 - 해녀 : 이전의 해녀복은 마로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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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창립과 조직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해 민주주의와 근대 문명을 익혔다. 독립협회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주독립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강령을 내걸었다. 구미파의 총본산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세력, 갑오개혁의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建陽協會)세력, 자주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급 중견관료층 세력 등, 당시 형성되고 있던 각계각층의 신흥 사회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신 지식층이었다. 개항 이래로 해외 시찰, 해외, 유학, 신교육, 신문과 서적 등을 통해 근대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 체계를 가진 신 지식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근대시민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구적 지식층과 동도서기사상(東道西器思想)에서 발전한 개신 유학적 지식층으로 구분된다. 다른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시민층 이었다. 시민층은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고,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농민층도 19세기 이래로 거듭되어온 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반봉건반침략의식이 강화되어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를 이루었다. 또한 광산이 개발되고 개항장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광산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등 임금 노동자들이 열강의 경제적 침탈을 체험하면서 저항의식이 높아져 또 다른 신흥 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신흥 사회세력 가운데 독립협회의 지도적 구실을 담당한 것은 신지식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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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창설하는 사업을 위한 고급관료 클럽으로 창립되었다.(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1호, 1896년 11월 30일자) 서재필이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다음 종래 영은문을 헐어버린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며 기존 시설을 개수하여 독립관과 독립공원을 건립하려는 구상을 하였으나 이를 추진하려면 그 뜻을 같이하는 세력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서재필이 독립협회의 조직을 구상하였을 때 국내에는 그의 이러한 견해와 의견을 같이하는 3개의 관료(건양협회, 정동구락부, 독립적 관료세력)세력이 귀국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있던 상태이다. 급진개화파로 구성 된 건양협회는 갑오개혁의 중심인물들로 서재필을 귀국시켜 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해준 개화파 세력이다. 이들은 당시 관료세계에서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형성시키고 있었으며 군주의 지위를 높이는 것과 대청 자주독립을 강력 하 에 추진하던 세력이었다. 외교계 관료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동구락부는 외국 외교관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던 관료세력이다.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 등이 주요 내국인 멤버로 한국을 중립국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사교클럽이었다고 한다. 독립적 관료세력은 위 두 가지의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개화정책을 지지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책 결정의 표면에 자주 떠오르지 않았지만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하여 개화정책 추진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오세창, 남궁억 등)독립협회는 위 3개 흐름의 세력을 모아서 창립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위 세력들은 창립 당시의 발기위원들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해야지 이후 독립협회조직과는 별개로 파악해야 한다.서재필은 독립문 / 독립관 / 독립공원 설립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위 세력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자신의 구상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1896년 6월경 그의 집에서 당시 영향력 있는 개화파 관료 등을 초청하여 구체적 준비를 협의하였으며 1896년 7월 2일 정식으로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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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獨立門) 의 재해석

독립문에서의 독립의 의미는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청나라의 내정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런 독립문의 역사적 의의를 알기 위해서는 짧게는 강화도 조약으로 거슬러 가야한다. 1876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조선 침략을 두고 가장 대립한 나라는 청이었다. 당시 외세 의존적인 민씨 정권은 청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하였고, 청은 민씨 정권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얻은 종주권을 가지고 일본과 대립하였다. 청의 간섭만 아니면 당장에라도 조선을 침략할 수 있었던 일본에게 청은 눈에 가시였다. 그래서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에도 제 1관에서 ꡐ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ꡑ라고 강조하였다. 사대외교에 따른 청의 조선에 대한 형식적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의도였다. 강화도조약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 정세는 개국․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라파(유럽), 미국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1882년 구식군인들은 민씨정권 이후 빈번 하게 일어나는 군료 미불 사태와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데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들은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하였고, 일본순사 등 일본인을 살해하였으며, 이후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이에 민씨 일파는 큰 타격을 받아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를 청국이 조정해 달라고 원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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