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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匠人)정신의 개념

‘장인(匠人)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국어사전에서는 ’장색(匠色)‘과 같은 말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 사람‘, 또 ‘손재주를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거나 또는 건축 따위 일에 불려 다니면서 벌이를 구하는 사람’, ‘(목공이나 도공(盜工) 등과 같이)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이라고 되어 있다.‘이조시대 전문적인 수공업자 장인들이 있어서 도자기, 칠기 등을 만들었는데, 계급사회이기에 그 직업은 세습되었다고 한다. 장인들은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고, 특히 끝마무리를 잘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유교적 관념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하늘의 길은 완전한 성실(誠實)이고, 인간의 길은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진실하게 부단히 노력하는 성실성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장인정신이라고 한다.’장인들이 습득했던 공정은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0여 년에 걸친 견습 기간 동안 견습장인(見習匠人)은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먼저 정신수양을 쌓아야 했으며, 그러한 수습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훈회장인(訓誨匠人)으로부터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졌다. 물론 기술 전수라고 하는 것도 어떤 체계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훈회장인의 경험과 판단에 의하여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갓의 판판한 양태를 인두로 구부정하게 휘는 일에 있어서 인두를 적당하게 달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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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 청자와 함께 고려인이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 역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세계 기술문명 발달사에 공헌한 일대 업적이다. 인쇄술은 고려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활발한 제작을 본 각종 서적을 출판하면서 발달을 본 목판인쇄기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목판인쇄기술의 발달은 대장경판의 조판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표적인 문화재로 8만 대장경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장경판이란, 일체의 불경을 모아 목판에 새겨 놓은 것을 말하며 그 것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면 불경 전집이 된다. 불교를 절대적으로 숭상했던 고려는 부처님의 힘을 빌려 외적을 물리쳐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 했고, 이것은 대장경 조판으로 나타났다. 대장경 조판사업은 제 1차 간행과 제 2차 간행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 데, 제 1차 대장경 조판은 「초판 고본대장경」과 「속대장경으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초판고본대장경은 거란군의 침입 때 부처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간행에 착수한 것으로, 8대 현종 때 시작하여 11대 문종 때 완성되었다. 대구 부인사에 대장경 사업을 담당하는 도감을 설치하고 6천여 권의 대장경판을 만들었으나 고종 19년 몽고군의 침략 때 불타버려 그 중 약간만이 일본에 남아 있을 뿐이다. 속대장경은 초판고본에 이어 간행한 것으로 ,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오는 길에 수집해 온 불경과, 요(거란)와 일본에서 수집한 것을 합쳐서 작성한「신편제종 교장총록」이란 불경의 총목록서에 따라 차례대로 만들었다. 모두 4,740권인데 역시 몽고 침입 때 초판 고본대장경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순천 송광사에「대반 열반경소」가운데 9권과 10권이 있고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에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대장경 간행, 즉 8만대장경의 조판은 몽고 침입 때 강화도를 임시 도읍으로 정해 피난살이를 하던 중, 부처님의 힘으로 국난을 막고자 조판에 착수했다. 이때 다시 대장경판을 조판하게 된 것은 1차 때 만든 대장경판이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종 23년(1236)강화도에 「간경도감」이라는 대장경판 조판을 위한 부서를 설치하고 곧장 조판에 착수하여 15년만인 1251년(고종 38)에 완성했다.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 뒤편의 장경각에는 81,137장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경판(經板)이 현재까지도 부식되거나 훼손됨이 없이 잘 보관되어 있다. 장경각의 담장 안으로는 낙엽 한 장 떨어지지 않고, 장경각 하늘 위로는 새 한마리가 날아다니지 않으며, 칠 백 여년의 기간을 경과하면서도 경판에는 먼지 하나가 끼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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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의 과학적 원리

옹기는 크게 질그릇과 오지그릇으로 나뉜다.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초벌구이를 한 그릇으로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가 없고 겉이 거칠거칠하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으로 윤이 나고 단단하다. 옹기의 색은 바탕흙의 재료, 소성방법과 유약을 입히는 경우 유약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바탕흙에 포함되어 있는 산화철의 양이 큰 작용을 하는데 철 화합물은 산화성 불에는 갈색이나 붉은색, 밤색 계통의 색을 내며 환원성 불에서는 푸른색 계통의 색을 낸다. 특히 유약 속의 산화철은 산화성 불에 의해 황색유가 되며 농도는 대체로 1~2퍼센트이다. 옹기는 적어도 1200~1300도라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데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청자기가 구워지는 1250도보다 더 높은 온도이다. 옹기가 숨쉬는 그릇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옹기 벽 속에서 800도 이상에서만 나타나는 루사이트(leucite)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과학관 학술총서6권 옹기편에 의하면 옹기를 굽는 과정에 고령토(Al2O3 SiO2 2H2O)가 루사이트(K2O Al2O3 4SiO2)로 변하는데 루사이트 현상에 의해 높은 온도로 가열됨에 따라 옹기 벽 내에 함유되어 있던 결정수가 빠져나가면서 미세기공이 생긴다. 이 미세기공은 공기는 통과시키지만 물은 통과시키지 않을 정도로 작아 스펀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비를 맞아도 빗물이 옹기 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공기는 옹기 안과 밖으로 서로 통하게 하여 안에 저장된 음식물을 잘 익게 하고 또 부패하지 않게 한다. 다시 말해 옹기 밖 공기와 옹기 안 공기가 순환작용을 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에서 물의 침투는 막고 공기는 통하게 하는 것은 방수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옹기는 간장이나 된장 같은 것들의 이상적인 보관 기구로 그 뛰어난 여러 가지 기능은 과학으로 잘 설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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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시행한 학술·사상의 통일방안. '분서갱유'란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땅에 묻어 죽인다는 뜻이다. BC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법가(法家)인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종래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는 등 철저하게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각종 통일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법가 일색의 정치에 대해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이에 반대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학파의 학설을 주장했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秦)의 기록, 박사관(博士官)의 장서, 의약·복서(卜筮)·농업 서적 이외의 책은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것을 위반하는 자, 유교경전을 읽고 의논하는 자, 정치를 비난하는 자 등은 모두 극형에 처한다고 정했다. 이것이 바로 ' 분서'사건이다. ' 갱유'는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들의 신선사상에 열중한 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하던 시황제가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분서를 시행한 다음해에 방사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잡아들여, 금령(禁令)을 범하고 요언(妖言)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웅덩이를 파고 460여 명을 생매장시켜버린 사건이다. 분서가 철저하게 법가주의에 근거하여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것과는 달리, 갱유는 방사들의 터무니없는 언동에 대한 시황제의 분노가 직접적인 동기였다. 그러나 이때문에 유가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살해되어 결과적으로 분서와 동일한 학문·사상의 압제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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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으로 외탁과 내탁 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임경업군수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사구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과 원총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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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의 기원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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