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의 분류
-단릉 :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각각 조성한 일봉일실 능으로 조선 왕릉 중 왕의 단릉은 장릉(장릉)을 제외하면, 건원릉(태조)과 정릉(중종)이 대표적이다. -쌍릉 :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헌릉(태종, 원경왕후), 강릉(명종, 인순왕후)등이 대표적이다. -삼연릉 :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삼봉삼실 능으로 경릉(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이 유일하다. -동원이강릉 : 하나의 정자각 뒤,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광릉(세조, 정희왕후), 헌릉(문종, 현덕왕후)등이 있다. -동원상하릉 : 한 언덕의 위와 아래에 각각 왕과 왕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영릉(효종, 인선왕후)과 의릉(경종, 선의왕후)이 대표적이다. -합장릉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일봉이실이나 일봉삼실 능으로, 영릉(세종, 소헌왕후), 홍릉(고종, 명성황후) 등은 일봉이실의 합장릉이고 유릉(순종, 순명 황후, 순정황후)은 유일한 일봉삼실의 삼합장릉이다. ✻조선 왕릉의 구조 ① 판위(배위)-돌을 깔아 놓아 참배자가 절을 하는 곳 ② 참도-신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다니는 어도로 나눔 ③ 수복방-능지기(능참봉)가 지내던 건축물 ④ 수라간-제사음식을 준비하던 곳 ⑤ 비각-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의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한 곳
역사 > 문화유산
고구려 사찰 건축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가 들어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가 창건되었고,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이 창건되었다. 또한 498년(문자왕 7)에 금강사(金剛寺)가, 영류왕 때는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寺) 등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1937년 평양 청암동의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 조사한 결과 5세기에 창건된 금강사지에는 남향으로 중문(中門)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東西)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또 1975년 평양 왕릉동 정릉사지(定陵寺址)를 발굴한 결과 5세기 창건으로 추정되는 정릉사에는 남향으로 중문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은 회랑으로 막혔고, 회랑 안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문에서 팔각탑 경내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고구려는 팔각의 목탑을 사찰의 중심 건물로 하고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에 북쪽 금당 좌우에 2개의 건물터가 또 있는데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덕수궁(德壽宮)
현재 사적 제124호로 지정 덕수궁 (德壽宮)이라는 이름은 상왕이 은거하는 궁궐이란 뜻의 일반적인 이름이며 궁궐 고유의 이름이 아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은 광해군 3년 (1611년) 당시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르던 곳 경운궁이란 이름은 광해군 3년부터 고종이 양위할 때까지 297년 동안 사용됨 경운궁에서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타율적으로 결정된 것임으로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은 옳지 않음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이 불타 없어져 선조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고 , 이곳을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그 당시 경복궁을 재건하자는 논의중 일부에서는 경복궁이 풍수 음양설(風水陰陽說)로 불길하다는 상소(上疎)가 있어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함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보지 못하고 1608년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창덕궁을 중건함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갔다가 도로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몇 년을 더 머물다가 광해군 7년(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함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침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됨 궁장의 수리를 명령하고 허술한 북쪽 담에 내장(內墻)을 쌓으라는 것 등의 이유도 이 때문임 인조는 1623년 인조 반정(反正)에 성공한뒤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 폐하고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함 그 해 7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됨 그리하여 경운궁은 그저 한때 국왕이 머물던 추억을 간직한 채 200여년 동안 비어있었음 -고종 시대의 경운궁 비어 있던 경운궁이 다시 왕이 임어(臨御)하는 정식 궁궐이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으며 이 아관파천의 원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임 국왕이 궁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에 머문다는 것이 주권 국가의 체면에 손상된 것을 고려하여 파천한 지 1년 만안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함 -고종 시대의 경운궁 경운궁 터는 1880년대에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하면서 그 공사관 부지로 떼어준 바 있기에 그 들 사이사이에 중건하는 형국이 됨 그 해 경복궁의 만화당(萬 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선덕전(善德殿)과 보문각(寶文閣)을 신축함
덕수궁의 건립
덕수궁은 본시 정릉동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월산대군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형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대신 풍부한 재산과 큰 저택을 소유하게 된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의주로 피신갔다 돌아온 선조가 이 저택을 임시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 명명하였다. 금세기 들어 조선 왕조가 열강들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 러시아 공관에 잠시 피신해 있던 고종이 이 곳으로 옮겨 오고부터 경운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23년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다음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부터 270년간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의 덕수궁
1897년 고종이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에 고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태상왕이 된 고종은 계속 이 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고쳤다. 순종이 왕위에 오른지 두해만에 왕실의 실권이 거의 일본에 넘어 갔고, 고종이 기미년(1919) 1월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덕수궁은 임금이 없는 완전한 궁궐이 되고 말았다. 1896년 고종은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할 때 태후,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실질적인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정릉사지
정릉사지는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있는 동명왕릉에서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이 사지를 정릉사지라 부르게 된 것은 이 유적에서 '정릉', '능사' 라 새긴 토기편이 발견되었기 대문이다. 1974년 정릉사지에 대한 대규모의 발굴이 진행되어 그 면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정릉사지는 5개 구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사만 18개소였고 회낭사는 10개소나 되었다.
상오리 사지
상오리 사지는 평양시 대동군 상오리에 위치하며 청암리 금강산지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38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한 변이 약 8.2m 되는 팔각건물의 기단이 발견되었는데 기단 외연은 직경 25m 내외의 냇돌을 써서 4열로 가지런히 깔았고 금강사지와 마찬가지로 암반을 쪼아 팔각형 기초를 만든 후 흙을 다져 기단을 이루었음이 확인되었다. 기단 안쪽에는 깬돌이 깔린 방형이 구획이 있었으며 기단 바깥 90m 위치에서 낙수 자국을 발견하였다.
금강사지
금강사지는 대동강 상류 석안의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에 위치하고 있다. 1938년 제1차 조사때에 한 변의 길이 10.02~10.23m 되는 팔각전지가 노출되었고 팔각전지 기단에는 남쪽으로 10.56m 지점에 중간지로 생각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팔각전지 동서로도 중문지 거리와 거의 같은 곳에 동금당지와 서금당지가 발견되었고 북쪽으로는 14.5m 떨어져 북금당지가 있었다.
고구려 불교 건축
고구려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이고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사원을 많이 건립하였다. 소수왕림 2년(372)에는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어 불교를 전하였고 동왕 5년(375)에는 국내성에 이불난사와 초문사를 창건하였다. 또 광개토왕 2년 (403)에는 평양에 9사가 창건되었고 문자왕 7년(498)에는 평양 금강사가 창건되었다. 형유왕(618~642년 재위) 때에는 중대사, 진구사, 유마사, 연구사, 대승사, 대원사, 금동사, 개천사 등이 있었고 보장왕 때에는 반용산 연복사, 영탑사, 육왕사 등이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 발굴되었거나 그 터가 알려져 있는 사찰은 평양의 금강사지, 정릉사지, 광법사지, 상오리 사지, 청호리 사지, 빙명사지, 중여사지, 낙사리 사지, 암사리 사지, 평천리 사지, 대왕사지 등과 평원군의 원오리 사지, 봉산군의 토성리 사지등이 있다.
청계천 개발의 필요성
청계천은 서울의 하수도였다. 조선시대 6백년간 도성의 백성들은 버리고 싶은 것들은 모두 담아 청계천에 버렸다. 굳이 청계천에 버리지 않았어도 수채 구멍을 통한 물은 모이고 모여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가뭄이 되면 쌓인 쓰레기와 배설물의 냄새가 도성에 진동하고 홍수가 나면 범람하여 쓰레기를 돌려주던 곳이었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이며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청계천의 자연적 요건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중랑천의 제1지류인 지방1급 하천으로 유로 연장 10.92㎞,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이다.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과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태백시 인근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백㎞ 가까운 한강의 흐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계천의 물길은 본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무교동, 광교, 장교, 수표교 등을 지나 방산동, 청평화시장 등을 관류하여 흐르며, 이 물줄기의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성북천과 정릉천이 차례로 합류하고, 마장동을 지나 중랑천 본류의 서쪽으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청계천 유역은 총 유역면적 50.96㎢로 서울시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지금까지 600여 년 이상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권을 담당해 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청계천과 그 지류의 유역을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한강 이북의 성북구․강북구․동대문구․성동구․중구․종로구의 총 6개 구에 달한다. 청계천의 지천은 복개되어 도로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약 14개의 지천이 청계천으로 합류되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성북천과 정릉천 뿐이다. 청계천의 하상경사는 1/310~1/510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유역내 상습 침수 지구였던 용두동 일대의 빗물을 배제하기 위하여 용두빗물펌프장을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청계천 하구로부터 시작되는 정릉천변 고속화 도로가 정릉천 입구까지 고가도로 형식으로 물길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청계천 유역내의 빗물과 생활하수를 전량 하수관거를 통해 집수하여 배수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고려왕릉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답습하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을 세우고 봉분의 주위에 양석, 호석을 세우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여 조선시대 왕릉제도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이처럼 현재의 조선 왕릉의 상설 제도는 그 기본 틀이 고려시대부터 쭉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이다. 개성 부근에 있는 왕릉은 총 17기이다. 그 밖의 왕릉들은 에 무덤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기록되어 있는 경우에도 막연히 성의 동쪽, 북쪽 교외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왕릉의 위치선정, 무덤구역의 설정, 무덤주위석조물들의 배치 등 외형상에서 전후시기와 구별되는 일련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의 역대왕릉들은 지형선택에서 남향한 산기슭 또는 산중턱에 왼쪽으로는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오른쪽으로는 산 능선이 뻗어서 서남쪽으로 휘어 들어오는 것이 보이는 아늑한 산기슭,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산 남쪽 경사면에 남북으로 길죽한 장방형의 땅을 구획하여 왼쪽, 오른쪽, 뒤쪽 세 면에 돌로서 담을 만들었고, 그 안에 세 개의 계(階)을 두었다. 그리고 각 계는 계단으로 연결이 되었다. 능역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대체로 2 : 1 정도 되게 잡았는데, 남북의 기이 약 36미터, 동서의 너비 약 18미터 였다. 무덤구역이 비교적 완전히 갖추어진 왕릉으로는 현릉과 정릉, 그리고 7군릉이 있다. 특히 우리가 고려시대의 왕릉을 조선과 연관시켜 살펴보려면 반드시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살펴봐야 한다. 이 두 개의 능은 공민왕 당시의 토목사업을 담당하였던 김사행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김사행이 조선 개창 후에도 계속 조정에 남아서 토목공사를 주도함으로써, 구 정릉(태조의 비였던 신덕왕후 능)과 흥천사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다. 그리고, 김사행을 보좌하던 무인 박자청, 김사행이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한 후 태종대에 토목사업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이 박자청에 의해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능인 건원릉을 세웠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왕릉 제도는 김사행, 박자청을 거쳐 조선시대로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자청은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를 건축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건원릉을 보면 고려시대 정, 현릉과는 다른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왕조가 바뀌면서 전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변형시켰음을 의미한다.
왕릉의 조성 절차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곧 빈전(殯殿) ・ 국장(國葬) ・ 산릉(山陵)의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장례준비를 하게 된다. 빈전도감은 장례일 까지 염습(죽은 이의 몸을 씻긴 후에 옷을 입히는 일) ・ 성빈(成殯:빈소를 만듦) ・ 성복(成服: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등 빈전에 관한 일을 맡고, 국장도감에서는 장의에 필요한 재궁(梓宮: 무덤을 지키려고 그 옆에 지은 집) ・거여(車輿) ・ 책보(冊寶:玉冊과 金寶) ・ 복완(服玩) ・능지(陵誌) ・ 명기(明器:장사 지낼 때에 무덤에 묻는 여러 기물) ・ 길흉(吉凶) ・ 의장(儀仗:의식에 쓰이는 무기나 물건) ・ 포연(鋪筵) ・ 제기(際器) ・ 제전(際箋:의식을 갖춘 제사와 의식을 갖추지 않은 제사의 총칭) ・ 반우(返虞:장사 지낸 후 신주를 모셔 돌아오는 일) 등의 의식과 절차를 관장했다. 그리고 산릉도감에서는 현궁(玄宮:임금의 관을 묻은 무덤 속 광중)과 정자각(丁字閣) ・ 비각(碑閣) ・ 재실(齋室) 등 봉분조성과 부대시설에 관한 일을 맡았다.
왕릉과 고분
고분은 고대인의 무덤을 가리키는데, 무덤의 형태나 크기 또는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한다. 무덤의 크기가 비교적 작으면서 무덤의 주인공이 왕이 아닐 경우 '묘(墓)'라고 부른다. 비교적 크기가 큰 대형묘로 주인을 밝힐 수 없는 무덤은 '총(塚)'이라 하고, 묻힌 사람의 신분이 왕으로 밝혀진 무덤의 경우는 '능(陵)'이라 한다. 2. 왕실의 묘를 부르는 명칭 - 위계에 따라 정함 1) 능(陵) :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의 사친(私親), 왕세자와 그 비(妃)의 무덤 3) 묘(墓) :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 등의 무덤 3. 능의 형식 1) 단릉(單陵) : 왕이나 왕비 중 어느 한 사람만을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능. 2) 쌍릉(雙陵) : 왕과 왕비를 하나의 곡장 안에 매장하여 봉분이 나란히 2기로 조성된 능. 3) 삼연릉(三連陵) : 왕 ・ 왕비 ・ 계비 등 세 명의 봉분 3기를 나란히 조성한 능 4)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좌우 두 언덕에 각기 한 기씩 조성한 능 5) 합장릉(合葬陵) : 왕과 왕비의 관을 함께 매장하여 조성한 능.
정릉 (사적 제208호)
정릉은 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의 본관은 곡산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태조는 고려시대의 풍습에 따라 향리와 개경에 향처와 경처를 각각 두었는데 강씨가 경처였다. 향처 신의 왕후한씨는 태조가 등극하기 전인 1391년 서거하였고 강씨는 조선개국과 함께 1392년 현비로 책봉되었다. 1396년 (태조5년)에 병환으로 승하하지 시호를 신덕왕후로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고, 이듬해인 1397년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에 예장하였다. 신덕왕후의 소생으로는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경순공주가 있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왕위계승다툼인 ‘제1차 왕자의난’이 1398년에 일어나 방석과 방번은 죽음을 당하였다. 정종에 이어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1405년 의정부에서 왕릉이 모두 성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논란이 있었다. 또한 도성밖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언이 잇따르자 1409년에 양주 사을 한록인 현재의 곳으로 옮겨졌고, 능의 목재와 석재의 일부는 태평관과 광통교 복구에 썼다. 정릉은 종묘에 배향되지 않고 민묘나 다름이 없이 능의 존재는 200여 년간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