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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의 분류

-단릉 :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각각 조성한 일봉일실 능으로 조선 왕릉 중 왕의 단릉은 장릉(장릉)을 제외하면, 건원릉(태조)과 정릉(중종)이 대표적이다. -쌍릉 :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헌릉(태종, 원경왕후), 강릉(명종, 인순왕후)등이 대표적이다. -삼연릉 :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삼봉삼실 능으로 경릉(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이 유일하다. -동원이강릉 : 하나의 정자각 뒤,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광릉(세조, 정희왕후), 헌릉(문종, 현덕왕후)등이 있다. -동원상하릉 : 한 언덕의 위와 아래에 각각 왕과 왕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이봉이실 능으로 영릉(효종, 인선왕후)과 의릉(경종, 선의왕후)이 대표적이다. -합장릉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일봉이실이나 일봉삼실 능으로, 영릉(세종, 소헌왕후), 홍릉(고종, 명성황후) 등은 일봉이실의 합장릉이고 유릉(순종, 순명 황후, 순정황후)은 유일한 일봉삼실의 삼합장릉이다. ✻조선 왕릉의 구조 ① 판위(배위)-돌을 깔아 놓아 참배자가 절을 하는 곳 ② 참도-신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다니는 어도로 나눔 ③ 수복방-능지기(능참봉)가 지내던 건축물 ④ 수라간-제사음식을 준비하던 곳 ⑤ 비각-왕릉에 묻힌 왕과 왕비의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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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현재 사적 제124호로 지정 덕수궁 (德壽宮)이라는 이름은 상왕이 은거하는 궁궐이란 뜻의 일반적인 이름이며 궁궐 고유의 이름이 아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은 광해군 3년 (1611년) 당시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르던 곳 경운궁이란 이름은 광해군 3년부터 고종이 양위할 때까지 297년 동안 사용됨 경운궁에서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타율적으로 결정된 것임으로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은 옳지 않음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이 불타 없어져 선조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고 , 이곳을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부름 그 당시 경복궁을 재건하자는 논의중 일부에서는 경복궁이 풍수 음양설(風水陰陽說)로 불길하다는 상소(上疎)가 있어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함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보지 못하고 1608년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광해군이 창덕궁을 중건함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갔다가 도로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몇 년을 더 머물다가 광해군 7년(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함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침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됨 궁장의 수리를 명령하고 허술한 북쪽 담에 내장(內墻)을 쌓으라는 것 등의 이유도 이 때문임 인조는 1623년 인조 반정(反正)에 성공한뒤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 폐하고 인조는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함 그 해 7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됨 그리하여 경운궁은 그저 한때 국왕이 머물던 추억을 간직한 채 200여년 동안 비어있었음 -고종 시대의 경운궁 비어 있던 경운궁이 다시 왕이 임어(臨御)하는 정식 궁궐이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으며 이 아관파천의 원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임 국왕이 궁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에 머문다는 것이 주권 국가의 체면에 손상된 것을 고려하여 파천한 지 1년 만안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함 -고종 시대의 경운궁 경운궁 터는 1880년대에 이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를 하면서 그 공사관 부지로 떼어준 바 있기에 그 들 사이사이에 중건하는 형국이 됨 그 해 경복궁의 만화당(萬 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선덕전(善德殿)과 보문각(寶文閣)을 신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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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덕수궁

1897년 고종이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에 고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태상왕이 된 고종은 계속 이 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고쳤다. 순종이 왕위에 오른지 두해만에 왕실의 실권이 거의 일본에 넘어 갔고, 고종이 기미년(1919) 1월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덕수궁은 임금이 없는 완전한 궁궐이 되고 말았다. 1896년 고종은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할 때 태후,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경복궁에서 시해된 민비의 빈전과 열성조의 어진(御眞)도 함께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궁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에 전각 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1896년에 경운궁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 비로소 아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실질적인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로도 공사가 계속되어 선원전, 함녕전, 보문각, 사성당 등이 건립되었고 이 해에 고종은 즉조당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광무 4년(1900)에 궁성(宮城)을 쌓는 일이 모두 끝났고 같은 해봄에 발전 시설이 되어 궁내에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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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자연적 요건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중랑천의 제1지류인 지방1급 하천으로 유로 연장 10.92㎞,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이다.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과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태백시 인근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백㎞ 가까운 한강의 흐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계천의 물길은 본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무교동, 광교, 장교, 수표교 등을 지나 방산동, 청평화시장 등을 관류하여 흐르며, 이 물줄기의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성북천과 정릉천이 차례로 합류하고, 마장동을 지나 중랑천 본류의 서쪽으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청계천 유역은 총 유역면적 50.96㎢로 서울시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지금까지 600여 년 이상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권을 담당해 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청계천과 그 지류의 유역을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한강 이북의 성북구․강북구․동대문구․성동구․중구․종로구의 총 6개 구에 달한다. 청계천의 지천은 복개되어 도로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약 14개의 지천이 청계천으로 합류되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성북천과 정릉천 뿐이다. 청계천의 하상경사는 1/310~1/510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유역내 상습 침수 지구였던 용두동 일대의 빗물을 배제하기 위하여 용두빗물펌프장을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청계천 하구로부터 시작되는 정릉천변 고속화 도로가 정릉천 입구까지 고가도로 형식으로 물길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청계천 유역내의 빗물과 생활하수를 전량 하수관거를 통해 집수하여 배수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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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왕릉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답습하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을 세우고 봉분의 주위에 양석, 호석을 세우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여 조선시대 왕릉제도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이처럼 현재의 조선 왕릉의 상설 제도는 그 기본 틀이 고려시대부터 쭉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이다. 개성 부근에 있는 왕릉은 총 17기이다. 그 밖의 왕릉들은 에 무덤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기록되어 있는 경우에도 막연히 성의 동쪽, 북쪽 교외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왕릉의 위치선정, 무덤구역의 설정, 무덤주위석조물들의 배치 등 외형상에서 전후시기와 구별되는 일련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의 역대왕릉들은 지형선택에서 남향한 산기슭 또는 산중턱에 왼쪽으로는 시냇물이 흘러내리고 오른쪽으로는 산 능선이 뻗어서 서남쪽으로 휘어 들어오는 것이 보이는 아늑한 산기슭,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산 남쪽 경사면에 남북으로 길죽한 장방형의 땅을 구획하여 왼쪽, 오른쪽, 뒤쪽 세 면에 돌로서 담을 만들었고, 그 안에 세 개의 계(階)을 두었다. 그리고 각 계는 계단으로 연결이 되었다. 능역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대체로 2 : 1 정도 되게 잡았는데, 남북의 기이 약 36미터, 동서의 너비 약 18미터 였다. 무덤구역이 비교적 완전히 갖추어진 왕릉으로는 현릉과 정릉, 그리고 7군릉이 있다. 특히 우리가 고려시대의 왕릉을 조선과 연관시켜 살펴보려면 반드시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살펴봐야 한다. 이 두 개의 능은 공민왕 당시의 토목사업을 담당하였던 김사행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김사행이 조선 개창 후에도 계속 조정에 남아서 토목공사를 주도함으로써, 구 정릉(태조의 비였던 신덕왕후 능)과 흥천사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다. 그리고, 김사행을 보좌하던 무인 박자청, 김사행이 왕자의 난으로 죽임을 당한 후 태종대에 토목사업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이 박자청에 의해서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능인 건원릉을 세웠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왕릉 제도는 김사행, 박자청을 거쳐 조선시대로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자청은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를 건축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건원릉을 보면 고려시대 정, 현릉과는 다른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왕조가 바뀌면서 전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변형시켰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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