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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갖추어어야 할 자질

1) 인격적 요소 인격(Personality)은 개인의 내면과 외면을 통합하는 것이고 인품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적, 성격적, 사회적, 지적, 도덕적인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은 태어나면서 얻는 것과 가정이나 학교, 지역, 직장등의 사회집단에 의하여 형성되며, 부단한 수양을 통하여 인격을 도와야 한다. 2) 교양적 요소 레크리에이션 지도자에게 요망되는 두 번째 요소는 교양, 또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교양은 일반교양과 전문교양의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교양은 리더쉽을 가지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대학의 일반 교양과목에 해당된다. 전문교양은 레크리에이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레크리에이션에 대한 제반이론을 포함한 전문 지식이다. 3) 기술적 요소 레크리에이션 지도에 있어서의 기술은 3가지로 (1)각종 레크리에이션 종목의 실기를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2) 특정그룹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과 (3) 레크리에이션 관리자로서 운영할 수있는 능력이다. 4) 경험적 요소 지도자는 레크리에이션 지도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실제의 경험을 통하여 쌓아야만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도자는 현장에서 폭넓은 실습과 경험을 통하여 자질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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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춤

백제는 삼국 중 인구가 많고 비옥한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어서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풍류를 구가하였으며, 해로를 통하여 일찍이 중국 남조 문화를 받아들여 불교 문화의 발달을 가져와 문화 예술을 일본에까지 전하였다. 일본에 전래된 기악 가면은 230여 종이 전래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 놀이로서는 현존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탈춤을 추고 나면 탈을 불사르는 풍습이 있어 기악 가면이 전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 맥을 이은 산대놀이(양주, 송파 지방)와 해서 탈춤(봉산, 강령, 은율 지방)이 다양한 가면과 놀이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한 지금의 영광 농악에서 볼 수 있는 잡색들의 가면 놀이로 이어진 듯하다. 이처럼 백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여 해외에도 영향을 끼쳤으나 문헌 자료와 유물 유적의 자료 등의 부족으로 춤의 유형과 종류를 다양하게 규명할 수 없어 아쉬움이 많다. 단편적이나마 추측할 수 있는 춤으로는 일본에 전해준 백제 무악, 농경 민속춤인 농악, 강강술래, 탁무, 불교 가면춤인 기악무 등이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백제는 고구려와 달리 중국 남조악인 청악계(淸樂系)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춤 문화를 영위하였다. 연무 양식이 가면춤극 형태로 발달하여 수백 종의 가면이 전한다. 둘째, 악사와 무용수의 벼슬이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셋째, 백제에서는 민속춤인 대동춤, 즉 농악, 탈춤, 소리춤(강강술래) 등이 형식을 갖추어 연희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마한․진한 땅에 건립된 만큼 그 민중 사이에는 고대국가 시대의 유풍이 가시지 않고 지속되어, 오늘날 농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부락 단위의 군무가 면면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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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의 기원

이두현 교수는 탈놀이의 기원을 서낭제 탈놀이와 산대도감계통극으로 나누어 논의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강릉관노가면극 등 서낭제에서 놀았던 서낭제 탈놀이는 서낭제에서 기원하여 발전한 토착적 탈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서울 근교의 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와 오광대는 산대도감계통극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종래의 산대희기원설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즉 이두현 교수는 산대도감극의 춤과 연기는 나례의 규식지희(規式之戱)에서, 대사는 나례의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처용무와 나례를 산대도감극, 즉 탈놀이의 선후 공의(公儀)로서의 나희(儺戱)가 급격히 쇠퇴하고, 영・정조 이후 나희가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그 연희자인 팽인(伻人: 편놈)들이 민간에서 탈놀이인 산대놀이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연희자들의 지방 분산으로 각 지방의 탈놀이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조동일 교수는 최근 각 지방 탈놀이의 형성과정에 대한 자신의 기존 학설을 상당히 수정하였다. 우선 기존 견해를 살펴보자. 조 교수는 탈놀이가 농악대 주도의 풍농굿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마을굿에서 농악대의 탈을 쓰고 노는 무리가 잡색으로 따라다니며 이따금씩 허튼 수작을 하기도 하지만, 마을굿을 하는 원래의 행사가 끝난 다음에 기회를 얻어서 놀이를 한바탕 따로 벌인 것이 탈놀이라고 하면서, 탈놀이가 마을굿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발전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탈놀이를 농촌탈춤과 도시탈춤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농사가 잘 되게 하려는 마을굿에서 농악대의 잡색들이 노는 놀이가 발전하여 농촌탈춤이 형성되었고, 18세기 중반 농촌탈춤이 상인․이속의 도시탈춤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탈놀이 연구의 초창기부터 가장 유력한 학설이었던 산대희기원설․산대도감극계통설과 대립되는 입장이다. 조동일 교수는 국가적인 축제로서 공연되던 산대희나 나례희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하층민인 재인・광대들이었고, 탈춤 공연자들이 나례도감의 명령에 따라 나례희의 공연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해도, 탈춤의 형성은 국가적인 행사와는 별도로 존재하던 민중적 전승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면서, 탈놀이의 산대희・산대도감계통극 기원설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서울 근교의 탈춤인 산대놀이는 다른 지방의 탈춤보다 일찍 도시탈춤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는 일이고, 양주와 송파의 별산대놀이는 본산대놀이의 분파일 것이지만, 서울 근교의 산대놀이가 전국적으로 전파되어 각 지방의 탈춤을 이루었다는 견해는 각 지방의 농촌탈춤의 발전으로 도시탈춤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산대놀이는 각 지방 탈춤의 모체라기보다 오히려 아주 특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대놀이․해서탈춤․야류․오광대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도 모두 교류와 영향의 결과로 처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노장과장․양반과장․할미과장이 여러 탈춤에 두루 나타나고 그 구체적인 전개마저 유사하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탈춤의 모체였던 굿 자체의 특징에서 유래한 것이며, 탈춤 발전의 사회적 여건 및 이와 관련된 주제의식의 공통성을 근거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촌탈춤이 도시탈춤으로 발전하면서 교류와 영향이 생길 수 있는 기회는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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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의 개념

탈춤이란 탈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왜 탈을 쓰고 춤을 추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에 우리는 신앙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에게 뭔가 특별한 소원을 청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것이다. 신의 모습을 해야 하니 당연히 탈의 모습은 무섭고 상징적인 형태에 색도 화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놀이 문화가 발달하면서 단순한 신앙의 모습을 지녔던 원시 문화가 놀이의 형태로 발달되면서 역할이 생겨나고 거기에 걸맞는 내용도 구성이 되어졌고 그 역활에 적합한 모습을 한 탈이 만들어졌다. 인간은 그것을 쓰고 그 역할의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고 춤을 추었다. 계급사회, 표현의 자유가 없었을 때 탈은 또한 좋은 면책 특권이었다. 억압받는 피지배계층은 탈춤을 통하여 지배층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조롱하며 즐거워했고, 그들의 지배층은 탈판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오만 방자하고 괘씸한 행위에 대하여 면책특권을 부여했다. 아마도 탈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탈춤이 벌어지는 그 공간만큼은 해방된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계급사회의 모순과 착취, 지배층과의 갈등, 그리고 숨막히게 조여오는 각박한 현실의 생활고와 나아가 인생살이 그 자체의 위선을 해학과 강한 비판 정신으로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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