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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치료의 개념

미국 무용 치료 협회(American Dance Therapy Association)에 의하면 "무용 치료는 한 개인의 정신과 육체의 통합을 위한 과정으로서 움직임을 정신 치료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지식은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얻어지며, 그 움직임을 통하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주변사람들을 먼저 경험하게 되는데, 무용치료는 인간의 신체를 사용해서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자유롭고 즉흥적인 동작 또는 움직임을 통해 표현과 경험함으로서 신체와 정신을 통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무용치료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완화시키거나 자극을 줌으로써 자기 발달과 자기표현, 내적갈등 등을 승화시키고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줌으로서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유지 또는 증진시키는 심리 치료적 가치를 갖는다. 이처럼 몸의 동작을 이용하기 때문에 '무용 동작치료'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용/동작치료는 신체와 정신, 감정과 신체성의 통합에 도달하기 위해 무용의 정해진 규칙이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다만 무용의 일반적인 요소들을 사용하게 된다. 움직임 자체에 언어가 있는 무용은 감정이입과 표현이 단순히 신체에 의한 율동인 것은 아니며, 그 안에 사상, 감정, 상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신체는 성격의 표현으로 무용치료에서 움직임의 사용은 한 개인에 대한 마음 상태 -기분이나 활동성, 무기력, 경직성 등-등을 말하며 움직임을 통한 상호작용은 새로운 경험이나 감각을 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치료 대상자의 즉흥적인 동작형태가 이 치료법의 출발점이 되며 기본을 이루는데 치료대상자의 동작을 치료사가 개입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동작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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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치료의 이론적 원리

무용 치료법은 다섯가지 필수적인 이론적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첫 번째 원리는 신체와 정신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할수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동작 수준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 날수 있으므로 치료사는 환자들의 동작경험과 언어 통찰력을 결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격려해야 한다. 두 번째 원리는 동작이 인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을 펼쳤으며, 그중 프로이드는 자아, 즉, 에고중에서 신체적 에고가 가장 먼저 발달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신체는 유년기의 상처에 대한 흔적을 보여고 있으며 그것은 영혼이 알지 못하는 그 어떤것을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고 했다. 그래서 언어라는 매체없이 이루어지는 무용의 치료는 인격발달의 비언어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고 동작이 정신 병리학이나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진 인격의 요소들을 잘 설명에 줄 수 있는 방법이 되고있다. 세 번째 원리는 무용치료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효율적인 접근 방식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가정이다. 환자에 대한 치료사의 반응이 주로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의 심리치료와는 대조적으로 무용 치료사는 환자의 동작을 그대로 움직이고, 반복하며 그것에 대해 덧붙이거나 반응을 보임으로써 환자에게 답한다. 따라서 언어치료법에 방어적인 환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네 번째 원리는 꿈, 그림, 꼬불꼬불한 글자, 입안에 뱅뱅 도는 말, 자유연상과 같은 동작이 무의식적인 증거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자각 분야에 존재하지 않는 영혼의 내용들로 억압되지 않은 생각, 느낌, 이미지 들을 포함함으로 동작이 상징하는 바를 통해 치료적 변화를 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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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의 역사

원래 탈춤은 인류역사와 함께 발생한 원시종합예술 중에서 특히 탈 분장에 의한 종교의식 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한국 탈춤의 기원에 대해서는 농경의례설(農耕儀禮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 說)의 세 가지가 논의되어왔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 舞)와 오기(五伎)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륙 전래의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 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대체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전하는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드라마가 정립되었다. 산대도감계통극은 보다 발전된 도시형의 탈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634년 (인조 12)에 산대극이 공의(公儀)로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 자들은 해산하여 주로 민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니 산대극이 점차 민중오락을 위 한 민속극으로 정착하게 된 것 같다. 산대도감계통의 탈놀이로서 현전하는 것은 중부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서북지방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영남지방의 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수영야류·동래야류가 있다. 이밖에 계통을 달리하는 놀이로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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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 춤의 기원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수단으로서의 춤은 모든 예술 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용이 내적 경험의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써 물질이나 돌, 언어 등을 사용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차 육체를 통해 우아하고 조화된 형태로 표현되게 되었다. 무용의 발생여원은 인간이 집단 취락을 시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외경과 공포 속에서 본능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집단적인 종교의식 또는 무속 행사를 하게된 데서비롯되었다. 이는 신을 추구하는 행위에서 나이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인적인 힘의 일부분이 되려는 의식적인 노력까지 그 테두리를 넓혀 갔다. 그러므로 무용의 기원은 세계 어느 나라든지 신과 직결되었으며 그 기원이 신앙적 제의에서 출발해서 그 종료로부터 독립될 때 비로소 예술의 한 분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상고시대의 민족은 자연물인 일,월,성,신과 산,천,수,목들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주장하여 생활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모든 자연에 정령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자연물에 대한 숭배의 관념이 생겨나고 제정의 관념이 싹트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연의 파괴행위가 신의 노여움의 결과라 생각했다. 여기서 숭배의 관념이 생겨나고 제정의 법도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영혼이 떠돌다 인간에게 붙어 질병을 일으켜서 사망하게 된다는 신념이 굳어져 갔는데, 여기서 주술과 무촉, 그리고 가무의식이 발생하게 되었다.따라서 우리의 무용은 토속신앙의 제천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이고 집단적인 제의밑에서, 하나의 의식으로서 또는 행사의 절차로서 행하던 원시적 집단가무였겠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 무용의 원초라 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소위 제정일치의 신정상태에 있었으며, 그 부족이나 씨족장이 제사장임과 동시에 군장이었다. 그들에게는 혈연이 중요하였으므로 조상숭배의 사상이 철저히 행해졌으며, 이러한 조상신의 숭배는 씨족을 굳게 단합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한 제천의식은 농경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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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의 어원

살풀이는 ‘살(煞: 사람이나 재물을 해치는 나쁜 기운으로서 무속적인 개념)’과, 맺힌 것 또는 얽매인 것을 풀어낸다는 뜻의 ‘풀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살풀이춤은 우리민족의 오랜 무속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귀신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려서 액을 풀어 내리는 주술의식의 ‘굿’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여러 가지의 굿을 행할 때, 살풀이가 마지막의 순서로 끼어있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즉, 원래 이 춤은 무당이 살풀이 굿을 할 때 살풀이 장단에 맞추어서 추는 냉혹한 춤이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굿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관기(官妓),사당패(寺黨牌),기녀(妓女)등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신검이나 지전을 가지고 추던 춤이 수건으로 바꾸어지고 또 홀춤으로 변화되면서 점차 멋을 부려 아름답게 보이려는 기법으로 변천하여 오늘날 예술성이 가장 높은 민속춤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무속에 기원을 두고 무당들이 신을 접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졌던 살풀이춤은 훗날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져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발달하여 기방 무용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굿이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미신으로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무업을 버리고 예인집단을 만들어 여기서 자신의 기예를 다듬으면서 그들의 춤이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살풀이춤의 형태는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며, 199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살풀이는 무속에서의 무가와 그것의 장단 명칭을 통칭하는 음악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홀춤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살풀이춤은 일단 그 명칭의 언어적 해석으로는 무속과 깊은 연관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구체적 춤사위는 무당이 행하는 것과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살풀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그 유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나라의 문화는 수도를 중심으로 문화의 집결지가 되는데, 서울의 궁중에는 궁중무용이 있었고, 민간에는 민속무용이 남아 있었다. 궁중무용인 궁중정제는 현재 국립국악제에서 보존 전승되고 있고 민속무용으로는 승무 살풀이춤, 입춤, 태평무, 검무, 한량무, 진쇠무, 화관무, 부채춤, 산조 등이 전승되고 있다. 그 가운데 살풀이춤은 현재 중요무형문화로 지정되어 보존회가 구성되고, 이를 통해서 전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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